주간동아 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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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8명만 죽이면 흙수저가 금수저 된다고?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8-11-26 11: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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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관객이 공연장에서 작품과 배우를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글라스’를 쓰는 것처럼 공연 속 티끌만 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자 ‘오타쿠글라스’를 씁니다.

    [사진 제공 · ㈜쇼노트]

    [사진 제공 ·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이 국내 초연임에도 화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배우 유연석이 출연하기 때문이다. 케이블TV방송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를 그리워하던 팬들이 그의 차기작을 학수고대한 터였다. ‘응답하라 1994’의 순둥순둥한 칠봉이에서 ‘미스터 션샤인’의 짠내 나는 동매로 캐릭터를 경신한 것. 

    알고 보면 그는 뮤지컬 배우로서 커리어가 적잖다. 2008~2009년 파릇파릇한 시절 ‘유령을 기다리며’ ‘세추안의 착한 사람’ 등으로 뮤지컬 무대에 섰다. 당시 영상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2015년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 역을 통해 본격적인 뮤지컬 배우로 발돋움했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그가 지난해 ‘연드윅’으로 미모를 뽐낸 뮤지컬 ‘헤드윅’ 이후 선택한 작품이다. 유연석은 “드라마 종영 후 휴식차 미국 가는 길에 이 작품의 대본을 받았고 꼭 참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8명 제치고 금수저 돼볼까

    [사진 제공 · ㈜쇼노트]

    [사진 제공 ·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는 로이 호니먼의 소설 ‘이스라엘 랭크 : 범죄자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2014년 토니상,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 외부비평가협회상, 드라마 리그 어워드를 수상했다. 몬티 나바로 역은 김동완·유연석·서경수가, 다이스퀴스 가문의 인물들(1인 9역)은 오만석·한지상·이규형이 연기한다. 임소하는 몬티의 연인 시벨라 홀워드, 김아선은 몬티의 약혼녀 피비 다이스퀴스를 원캐스트로 연기한다. 

    작품은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에서 가난하게 살던 몬티가 어느 날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그린다. 몬티는 영락없는 ‘흙수저’ 중 흙수저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되다니. 하지만 실제로 그가 막대한 재산과 성을 상속받으려면 갈 길이 멀다. 백작을 포함해 그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8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8명을 ‘제끼면’ 진정한 금수저가 될 수 있다. 당신이라면 하겠는가. 



    공연을 여닫는 건 몬티의 내레이션이다. 과거 회상 장면은 극중극으로 넣었다. 브로드웨이 무대와 달리 한국 공연 무대는 몬티의 책상과 일기장을 콘셉트로 잡았다. 김동연 연출은 “몬티의 회고록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과 변화를 직접 무대화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사람이 계속 죽는 것을 관객이 희극적 요소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몬티가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들과 만나 음모를 꾸미는 장면을) 극중극으로 넣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실제로 몬티가 손대지 않고 코를 푼 첫 번째 ‘살인’ 장면에서 가장 큰 웃음이 나왔다. 

    원작이 고전이거나 아주 유명하다면 번역 투의 대사를 써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블랙코미디 장르의 외국 유머를 그대로 가져왔다간 쫄딱 망하기 쉽다. 

    그래서 이 작품은 번역과 각색에 공을 들였다. 미국식 유머를 한국식으로 바꾸고, 유행어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적중률은 꽤 높다. 거의 모든 개그 포인트에서 웃음이 나왔다. 글로 쓰자면 ‘하하’보다 ‘깔깔깔’이나 ‘와하학’ 정도. 개그맨 유민상이 tvN ‘짠내투어’에서 본의 아니게 유행시킨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이네요”를 유연석이 말할 줄이야.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같은 ‘로봇 연기’의 아이콘 장수원의 대사나 “내가 이러려고 불우이웃을 도왔는지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라는 대사도 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다면 그 생각이 맞다. 

    몬티 이상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들. 몬티 역의 배우가 무대에서 퇴장 없이 극을 이끌어가느라 힘들다면,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들 역을 맡은 배우는 수시로 등장, 퇴장을 반복하며 분장과 연기를 변검처럼 갈아 끼우느라 바쁘다. 9명의 개성 강한 캐릭터를 겹치지 않게 연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있다(극에는 나오지 않지만 초상화 속 어머니 역할까지 합치면 10명에 달한다). 

    이날 공연에서 유연석과 합을 맞춘 다이스퀴스는 뮤지컬 배우 한지상. ‘젠틀맨스 가이드’라는 작품 자체를 처음 보기에 영 재미가 없으면 노래라도 건지자는 생각으로 고른 캐스팅이었는데, 유연석의 풍부한 성량에 놀랐고 원래 노래를 잘하는 한지상은 가창력보다 코믹 연기가 더 빛날 정도였다. 그가 골반을 쉴 새 없이 흔들며 “그러게 왜 가난하고 그래~”라며 능청스럽게 노래할 때는 몬티처럼 ‘저 놈, 죽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지상이 표현하는 무대 뒤는 그야말로 ‘전쟁터’. 15~20초 안에 옷을 한 벌씩 모두 10여 벌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대사를 치기 전 “숨 좀 돌립시다”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가 애드리브인지 아닌지는 공연을 두 번 본 게 아니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는 의상 퀵체인지에 대해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예술”이라며 “그렇게 하기에 무대에서 백조처럼 웃을 수 있다. 뒤에서 스태프들이 많이 고생한다”고 말했다.

    ‘병맛’ 블랙코미디

    [사진 제공 · ㈜쇼노트]

    [사진 제공 · ㈜쇼노트]

    극 내내 “숨 좀 돌릴 시간”도 없이 8명의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들을 연기한 한지상은 무대에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부분에서 감옥 관리인 천시 다이스퀴스로 등장해 깨알 웃음을 선사한다. 이는 남이 문 금수저를 뺏어 내 입에 물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상속 전쟁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어떤 장면인지는 직접 확인하길. 

    공연장에서는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유연석의 사진을 깔아놓은 이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이들이 이날 한 배우의 팬으로 왔다 작품의 팬으로 돌아갔으리라는 점이다. 몬티 역은 취향의 차이라 원하는 배우로 보면 되고, 오히려 고민되는 건 다이스퀴스 역이다. 세 배우의 개그 스타일이 워낙 달라 고민이 좀 될 것이다. 물론 세 번 보면 해결된다. ‘병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블랙코미디를 원한다면 답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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