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전통시장 ‘수크 와키프’ 내 이란 마켓. [이세형 동아일보 기자]
11월 17일 오후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시장인 ‘수크(Souk·아랍어로 시장이란 뜻) 와키프’ 내 이란 마켓(이란 식당과 상점이 많은 골목). 이곳에서 공예품을 파는 상인은 미국의 이란 핵합의(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탈퇴와 원유 금수조치를 포함한 2단계 대(對)이란 경제·금융 제재 개시(11월 5일)에 대한 의견을 묻자 목소리를 높였다. 그 옆의 이란 식료품 가게에서 채소를 손질하던 상인도 “미국과 이란 사이가 너무 안 좋아 불안하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와 이란(이슬람 시아파 종주국)은 지역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경쟁해왔다. 카타르는 원래 사우디 편이었다. 카타르 왕실인 사니 가문은 사우디 왕실인 사우드 가문과 출신 지역이 같다. 그러다 1995년 카타르에서 발생한 왕실 쿠데타에 사우디가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이란과 가까워졌다. 카타르와 이란은 아라비아만(이란에선 페르시아만)의 세계 최대 천연가스전(카타르령 노스돔·이란령 사우스파)도 함께 쓰는 사이다.
이로 인해 무역과 인적 교류가 다른 아랍 국가들에 비해 활발한 편이다. 특히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등이 친이란 외교정책과 이슬람 극단주의 지원 의혹을 제기하며 카타르와 단교(교역 중단 및 영공·영해 폐쇄)를 결정한 지난해 6월 이후 이란과 교류가 더욱 늘었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는 카타르와 이곳에 거주하는 이란인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카타르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충돌 같은 극단적 사태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급격한 변화가 생길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마에 오른 이란의 지역 영향력
중동 외교가에선 이란과 미국 관계가 ‘오바마 시절보다 복잡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지역 영향력 확대’를 핵무기 개발 가능성 못지않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큰 변화로 꼽는다.
이란은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호메이니가 1979년 혁명을 통해 팔레비 왕정을 붕괴시킨 뒤 신정일치에 가까운 공화정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반미 노선’을 국가운영의 핵심 의제로 삼았다. 사실상 이때부터 미국에 미운털이 박혔고, 직간접적 경제 및 안보 제재에 노출돼왔다. 1980~88년에는 아랍권의 군사강국이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이라크와 전쟁도 치렀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뒤 이란은 자국 땅에서 전쟁을 막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국가와 조직을 견제하기 위한 대외 전략을 수립했다. 주변국을 상대로 한 친이란 정권 수립과 무장조직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특히 시아파 인구가 많고 정세가 불안한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 이른바 ‘시아 초승달 지대’(지도 참조)에서의 영향력 행사에 공을 들였다.
이스라엘 견제를 목표로 레바논 남부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를 적극 지원해온 게 대표적인 예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여파로 흔들렸던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원하고자 시리아에 군대를 파병했고, 최근에는 이 나라에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 역시 이란의 지역 영향력 확대 사례다.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진 이라크는 군대를 파견해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했다. 덕분에 시아파 민병대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었다. 현지에선 이란의 개입이 IS 퇴치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경제적으로도 이라크의 이란 의존도는 높다. 시장에는 이란산 식료품과 공산품이 주를 이룬다.
사우디 등 아랍 국가들이 이란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이유들이다. 이스라엘이 장기적으로 사우디보다 이란을 훨씬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의 근거로도 주변국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 행사가 꼽힌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는 이란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지적이 거의 없었다. 당시 미국은 이란과 협상에서도 철저히 핵무기 개발 억제에 초점을 맞췄고, 지역 영향력 확대 이슈는 거의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조지타운대 카타르 캠퍼스의 메흐란 캄라바 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오바마 대통령과 존 케리 국무장관은 선거(개혁을 바라는 이란인들의 의지 반영)와 장기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이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해결 실마리 찾기 어려워
반면 트럼프 대통령,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수차례 이란의 ‘지역 활동(regional activities)’을 중동의 안정을 해치는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카타르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의 마르완 카발란 정책분석파트 디렉터는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이 중동지역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매우 우려하고 있고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려 한다”며 “미국뿐 아니라 (반이란 국가인) 사우디, UAE, 이스라엘도 이 문제를 향후 핵심 이슈로 여길 것”이라고 내다봤다.이란의 지역 영향력 확대는 핵무기 개발보다 훨씬 다루기 힘든 문제가 될 수 있다.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핵무기와 달리 이란의 지역 영향력은 실체와 성과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란으로선 그만큼 포기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럿 블랑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란의 지역 영향력 확대 정책은 국가 안보의 중심에 있고, 과거 이라크와 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이라며 “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내 대표적 강경파인 이란혁명수비대(IRGC)가 지역 영향력 확대 전략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캄라바 교수는 “이란에선 외교부뿐 아니라 IRGC도 외교 관련 업무를 진행한다”며 “특히 IRGC는 이라크, 시리아처럼 이란과 가까운 나라들에 대한 외교 업무를 많이 다룬다”고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파와 실용주의 성향의 인사가 많은 외교부와 달리 IRGC는 반미 성향이 강하고, 미국과 협상에도 부정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JCPOA 탈퇴 뒤 IRGC 진영에선 하산 로하니 대통령 등 ‘협상파’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나왔다.
결국 미국이 분명한 ‘안전 보장’을 해주기 전까지는 이란이 지역 영향력 확대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공개적으로 이란을 ‘불량 국가’라고 표현할 만큼 불신이 깊은 트럼프 행정부가 대이란 적대 정책을 바꾸는 것 역시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인다. ‘반(反)이란’ 정서가 강한 사우디, UAE, 이스라엘이 향후 어떤 식으로 이란의 영향력 확대 움직임에 태클을 걸지도 중요한 변수이자 관전 포인트다.
이세형_ 현재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카타르 도하에 있는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