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이 아주 까만색인 블랙 트러플(왼쪽)과 갈색인 화이트 트러플. [shutterstock]
휴대전화는 물론이고 손목시계도 없었지만 ‘밥때’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차올랐기 때문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며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약간 쓸쓸하긴 했으나 가족과 맛있는 저녁밥을 먹는다는 생각에 금세 훈훈한 마음이 들었다.
맛보다 향으로 기억되는 트러플
맛있는 음식은 여러 이유로 기억에 남는다. 같이 먹은 사람이 좋아서 맛있게 기억될 수도 있고, 어떤 도드라진 맛 하나로 또렷이 각인되기도 한다. 음식의 고유한 향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경우도 적잖다. 로라 로우가 쓴 책 ‘맛’을 보면 ‘우리가 어떤 음식에 대해 느끼는 인상은 약 80%가 냄새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실제로 치즈나 두리안처럼 냄새가 강한 것을 먹을 때 코를 막으면 고유한 맛이 꽤 흐려진다. 식재료 가운데 버섯은 주로 ‘맛’보다 ‘향’으로 즐긴다. 막 제철을 넘긴 송이버섯이 대표적이고, 지금 한창인 트러플도 그에 속한다.신선한 송이버섯은 결대로 찢어 먹으면 쌉싸래한 맛이 난다. 반면 트러플은 향이 강해 맛 자체의 특색을 느끼기 어렵다. 트러플(truffle)은 송로버섯의 영어 이름이며, 프랑스어로 트뤼프(truffe), 이탈리아어로는 타르투포(tartufo)이다. 한국에서는 왜 ‘송로(松露)’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잘 모르겠다. 트러플은 떡갈나무나 참나무, 헤이즐넛나무 아래서 주로 자라며 소나무 아래서 발견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느다란 솔잎에 맺힌 이슬’처럼 맛보기가 쉽지 않은 버섯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트러플은 나무 아래 땅속 5~30cm 깊이에서 자란다. 사람이 육안으로 찾을 수 없어서 후각이 발달한 개를 동원해 트러플을 찾는다. 트러플을 찾는 개는 별도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개가 트러플을 먹어치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돼지를 이용했는데 훈련이 쉽지 않아 점차 개로 역할이 옮겨갔다.
트러플은 블랙과 화이트 두 종류가 있다. 블랙 트러플은 프랑스 페리고르(Perigord)와 퀘르시(Quercy),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와 피에몬테(Piemonte) 지역에서 나는 것이 유명하다. 화이트 트러플은 피에몬테, 그중에서도 알바(Alba), 아스티(Asti)에서 나는 것이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다. 화이트 트러플이 블랙 트러플보다 채취되는 양이 적고 향도 훨씬 뛰어나 가격 역시 몇 배 비싸다. 2010년 열린 트러플 경매에서 900g짜리 화이트 트러플이 10만5000유로(약 1억3454만 원)에 낙찰됐다.
제철이면 생산지의 상점들에서 트러플을 흔히 볼 수 있다.
리소토, 파스타 등에 곁들일 때 빛나
블랙 트러플이 든 셀러리악 리소토.
화이트 트러플이 듬뿍 올라간 감자 뇨키.
혹시 트러플 한 조각을 손에 넣었다면 달걀프라이에 곁들여 먹으면 된다. 노른자위를 깨지 않고 조리하는 ‘서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이나 수란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트러플을 얇게 썰어 올린다. 마지막으로 좋은 올리브 오일이 있으면 살짝 뿌리고, 아니면 소금간만 가볍게 해도 괜찮다. 노른자위를 터뜨려 트러플과 함께 입에 가득 넣어 맛본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맛과 향이 목구멍을 가득 채운다. 사치스럽지 않지만 우아하고 풍요로우며 기분 좋게 기름지다.
여름에 채취한 트러플은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제조된다. 올리브 오일에 트러플을 넣어 향을 낸 트러플 오일, 곱게 간 트러플을 녹은 버터에 넣은 뒤 굳힌 트러플 버터 등이 있다. 트러플을 섞은 소금도 판매한다. 여름 트러플을 통째로 염장해 한두 개씩 병에 넣어 팔기도 하고, 치즈나 크림에 트러플을 섞은 제품도 꽤 많다. 염장한 트러플은 그리 짜지 않아 그대로 썰어 요리에 곁들이거나, 빵에 올리브 등과 함께 올려 먹으면 맛있다. 트러플 관련 제품은 백화점이나 외국 식재료를 파는 상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