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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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미래 위협하는 ‘저축의 덫’

중·노년층 과잉저축이 만성적 투자 수요 부족으로…창업이 답인 이유

  •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jha@hanyang.ac.kr

    입력2015-12-15 14: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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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이후 노년층의 경제 문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결국 ‘젊은이들을 어떻게 부릴 것인가’로 요약 가능하다. 노년층이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는 결국 그때그때 청·장년층이 만든 것일 수밖에 없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내가 먹을 바나나를 미리 열심히 모아둔다고 해서 노인이 된 후 꺼내 먹을 수는 없다. 결국 노인들은 젊은이들이 생산한 바나나를 먹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만약 바나나를 생산하는 젊은이들이 없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모아도 바나나를 먹을 수 없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다.
    노년층이 청·장년층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가족 내에서 내 자식들에게 일을 시키는 전통적 방법이다. 둘째, 그동안 모아둔 자산으로 젊은이들을 부리는 좀 더 세련된 방법이다. 돈을 빌려줘 이자를 받거나 부동산을 임대해 소득을 얻거나 또는 모아둔 자산을 젊은이들에게 팔아 생활비로 쓰는 경우다. 셋째, 국가의 힘을 빌려 세금과 복지제도를 통해 젊은이들이 생산한 재화 및 서비스를 갖다 쓰는 것이다. 물론 이들 방법이 모두 순수한 공짜는 아닐 터이다. 노년층 역시 젊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그 윗세대를 직간접적으로 부양했기 때문이다.
    다만 달라지는 것이 있다. 과거 같으면 노인 한 명을 젊은이 대여섯 명이 10년 정도 부양하면 족했을 텐데, 이제는 노인 한 명을 젊은이 두어 명이 20년 넘게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출산율과 사망률 통계만 갖고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거의 확실한 거시경제적 충격이다. 사회학자 콩트가 이야기했듯, 인구 변화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Demography is destiny).

    돈 빌릴 젊은이가 없다

    우리나라는 가족을 통한 노인 부양에 의존하다 근래 들어 급속히 자산을 통한 부양으로 이행하고 있는 국가다. 국가의 국민연금제도는 아직 적용 범위가 넓지 않은 데다, 여기서도 갈수록 복지보다 자산 저축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와 청·장년층 인구의 감소, 즉 인구절벽을 맞게 되는 한국이 미래를 위해 선택한 길은 오로지 ‘저축’뿐인 것이다.
    중년층과 노년층의 저축은 개개인에겐 노후 대비를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러한 대규모 저축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만은 아니다. 크게 봐서 중·노년층 저축은 청·장년층의 투자 수요로 연결돼야만 원하는 과실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중·노년층 수에 비해 청·장년층 수가 적어지기 시작하면 투자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근본적 제약이 발생한다. 즉 과잉저축 또는 과소투자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저축이 국내에서 투자로 소화되지 못하고 남으면, 그 남는 부분은 경상수지 흑자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국내 젊은이가 줄어 충분한 투자 수요를 일으키지 못하니까 남는 돈을 해외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는 결국 미국 국채나 다른 해외 유가증권의 형태로 쌓이기 마련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246억 달러였던 한국의 순대외채권이 올해 9월 말 3129억 달러(약 369조29억 원)로 늘었다는 뉴스나, 우리나라가 사상 최대 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40개월도 넘게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냥 즐겁지 않은 이유다.
    과잉저축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 나라들에서 두드러지지만 사실 대다수 선진국, 나아가 세계경제 전체의 문제다. 로런스 서머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장기침체론(Secular Stagnation)’을 들고 나온 배경에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늘어난 저축에 비해 투자 수요가 부족해 균형 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경제성장은 정체된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중·노년층은 많은데 돈을 빌리겠다는 젊은이는 별로 없다.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까지 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경제가 만성적인 수요 부족 상태에 놓이게 된다.

    소비 활성화의 전제 조건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세계적 저축 과잉(global saving glut)’은 세계경제 불균형과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남는 돈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산거품을 일으키면서 금융위기가 뒤따르는 것이다.
    사실 거품은 과잉저축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남는 돈을 대규모로 흡수하는 데는 부동산 거품만한 게 없다. 다만 그것이 중·노년층이 부동산 형태로 저축해놓은 자산을 젊은이들에게 높은 가격에 떠넘기는 수단이 될 때는 사실상 젊은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도박을 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빚을 내 부동산을 떠안은 이들이 거품이 꺼졌을 때 받게 될 고통은 경제 침체의 골을 더 깊게 만들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경제가 과잉저축을 해소하려면 먼저 상당한 수준으로 소비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는 소비를 활발히 하는 계층인 청·장년층에게 소득 기반을 마련해줌으로써 가능하다. 튼튼한 소득 기반은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길 때 만들어진다. 근본적으로 고령화에 따른 과잉저축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풍부한 저금리 자금을 이용해 젊은이들로부터 생산적인 투자 수요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똑똑한 젊은이들은 스스로 투자에 나서기보다 대기업이나 공무원, 공기업 등 안정적이지만 그 수가 극히 제한된 일자리를 절대적으로 선호한다.
    물론 이들이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혁신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자본 수요를 창출해낸다면 이 역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늙은 조직 안에서는 젊은이들이 경영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고 혁신성을 발휘하기도 어렵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특히 새로운 산업의 창출이나 과거와 단절되는 큰 혁신은 주로 새로 창업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이뤄진다. 결국 관건은 젊은이들이 창업을 두려워하지 않고 창업기업의 상당수가 중견기업과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건전한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기업가정신을 갖지 못하고 안정만 추구하도록 젊은이들을 유도하는 사회에서는 과잉저축을 흡수할 만한 투자 수요를 창출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투자 수요가 제한되면 좋은 일자리 창출이 어렵고, 소비 수요를 만들어내기도 어려우며, 결국 경제는 축소지향형으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는 2017년부터 감소세로 접어든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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