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왼쪽)이 11월 24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테러방지 관련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강조하고 있다. 동아일보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를 긴급하게 소집한 이유는 파리 등에서 발생한 연이은 테러로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급박한 상황 때문입니다. (중략) 테러방지법, 통신비밀보호법, 사이버테러방지법 등 국회에 계류된 테러방지법안들을 국회가 처리하지 않고 잠재우고 있는데, 정작 사고가 터지면 정부를 비난합니다. 부디 14년간 지연돼온 테러 관련 입법들이 이번에 통과돼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랍니다.”
언제나 그렇듯, 대통령의 표정은 서슬 퍼렜다. 11월 24일 열린 국무회의 석상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남긴 모두발언.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이 사안이 그간 박근혜 정부의 주요 숙원 사업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긴 시간 정치권이 이 문제를 외면해왔다는 성토에 이르면 절로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일한 전·현직 당국자들의 속내를 들어보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안보 사안의 최고논의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테러방지법 관련 토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된 일은 기억에 없다는 것. 특히 이 법안이 공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핵심 쟁점, 즉 테러 대응을 총괄할 컨트롤타워를 어느 부서가 맡느냐는 한 번도 진지하게 거론된 바 없다는 이야기다.
대통령 지침도, NSC 논의도 없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솔직히 말해 이 사안에 대해 별다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이다. 테러 대응 문제 역시 대통령훈령으로 돼 있는 국가대테러활동지침에 따라 차관급이나 국장급이 논의하면 되는 실무 문제로 생각해온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관계자 역시 “테러방지법이나 대응조직체계에 대해 박 대통령이 이렇다 할 지침을 내린 적은 없다”고 말한다. 지침이 없었으니 NSC나 관계부처 사이에서 제대로 된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방침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를 방증하는 하나의 사례가 11월 중순 임종인 대통령비서실 안보특별보좌관이 일부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힌 ‘국민안전처 컨트롤타워 안(案)’이다. 정보기관에 과도하게 힘이 쏠리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 국민안전처 내에 국가정보원과 검찰, 경찰, 금융정보분석원(FIU) 등이 두루 참여하는 대테러기구를 구성하되, 법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독립적인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테러방지법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다.
임 특보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했지만, 국가정보원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국정원 컨트롤타워 안’과는 자못 거리가 멀다. 발언 직후 안보부처 내부에서는 “정부 방침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쏟아졌고,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여당 측 관계자들 역시 “청와대의 진의를 알고 싶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서두에서 본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여당 측 정보위원회 관계자는 “이 사안과 관련해 청와대와 상의한 바 없다”고 전했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가운데)이 11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긴급 현안보고에 참석하기 위해 정보위 위원들과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동아일보<br>
“통과돼야 한다”는 대통령의 당위론만 있을 뿐, 핵심 쟁점을 어떻게 돌파해야 좋을지 세부 지침에 대해서는 아무도 갈피를 잡아주지 않는 형국. 테러방지법안을 둘러싼 최근 상황은 이러한 공백을 뚫고 국정원이 ‘화려한 개인기’를 펼치고 있는 것에 가깝다. 11월 18일 국회 긴급 현안보고를 전후해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연계세력의 국내 테러 위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흘려온 국정원 측은, 일부 숫자나 사실관계가 과장됐다는 야당 측 반발에도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여당 측의 테러방지법안 3개가 모두 국정원 안에 컨트롤타워를 두는 그림을 전제로 하는 만큼, 하루라도 빨리 논의가 진전될수록 유리하다고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공식 논의는 11월 27일 정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해 출발하지만, 아직까지는 여야 모두 충분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는 게 정보위원회 소속 양당 관계자들의 속내다. 19대 국회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통과가 가능할지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유다. 사안의 핵심은 컨트롤타워가 될 국가대테러센터(가칭)를 국정원이 맡는 게 과연 옳으냐는 것. 정보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에서조차 과도하다는 지적이 반복해 등장할 만큼 우려가 적잖기 때문이다. 테러단체와 인물 지정부터 의심되는 인물의 출입국 및 금융거래와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 수집, 군 병력 지원까지 폭넓은 권한을 규정하고 있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야당 측은 2012년 정치 댓글 사건부터 최근 해킹 논란까지 무수한 사건·사고를 일으켜온 국정원 전력을 감안하면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검경 등 공안당국이나 국방부, 외교부, 기획재정부 등 법안에 따르면 테러대응 과정에서 ‘지휘나 다름없는 협조 요청’을 받게 될 다른 부처 관계자들 역시 내심 불만투성이다. 사실상 국정원발(發)인 이들 법안이 의원입법 형식을 빌린 것도 이러한 반발을 의식해서였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는 “뒤집어 말하면 청와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속도를 확 끌어올릴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11월 중순을 기점으로 야당 측 일각에서 흘러나온 ‘NSC 컨트롤센터 안’이 그 연결고리다. 정보위원회 위원인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가 “테러방지법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일반 테러에 대한 대응을 NSC가 맡는 방향이라면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게 출발점.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역시 “청와대를 컨트롤타워로 하고 국정원은 집행만 하면 여야가 충분히 타협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거들고 나섰다. 한 전직 안보부처 고위당국자의 말이다.
“다른 때 같으면 야당 원내대표의 이러한 언급은 정부로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나 다름없다. 이 아이디어를 받아 공격적으로 치고 나갔다면 테러방지법 논의가 탄력을 받지 않았겠나. NSC 상임위원장을 겸임하는 국가안보실장을 중심으로 컨트롤타워를 구성하는 그림을 청와대가 나서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미 꺼내놓은 말이 있으니 야권에서도 ‘국정원의 위험성’만 거론하며 버티기 쉽지 않았을 테고, 이후 말이 바뀐다면 관련 입법 지체의 책임은 고스란히 야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실기(失機)다.”
“김관진이 나섰어야 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국가안보실(안보실)의 위상 측면에서도 충분히 의미심장한 아이디어였다고 말한다. NSC는 헌법기구지만 안보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 외교안보수석실→NSC 사무처→통일외교안보정책실→국가위기관리실 등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온 것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국가대테러센터를 NSC에 두게 되면 현실적으로 NSC 사무처 기능을 수행하는 안보실 산하에 관련 조직이 구성될 테고, 정부가 바뀐 후에도 국가안보 상황을 총괄하는 청와대 내부 조직의 위상은 한층 견고해질 기회였다는 이야기다. 외교안보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조직을 발 빠르게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행보를 감안하면 더욱 아쉽다는 것. 이번에는 민간 전문가의 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여야 가릴 것 없이 테러를 다른 안보상의 위기와 별개로 보고 있다는 게 혼선의 근본적인 한계다. 세월호 사고 당시 안보실이 ‘재난은 소관사항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바람에 논란이 일었지만, 테러 역시 안보실 소관이 아닌 것일까.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전체적인 흐름은 일상에서의 테러야말로 대규모 전쟁 못지 않은 안보상 위기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히려 청와대 안보실 산하 위기관리센터와 테러 대응 컨트롤센터가 분리되는 게 훨씬 더 기묘한 구조이므로, 차라리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 테러 대응 기능을 부여해 관련 업무를 통합하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이러한 설명은 9·11테러 이후 미국이 공들여 추진한 정보조직 개편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한결 쉬워진다. 당시 문제의식은 CIA(중앙정보국)와 FBI(연방수사국), 국방부 산하의 NSA(국가안전보장국)와 DIA(국방정보국) 등 총 16개 기관이 영역별로 업무를 나눠 맡는 바람에 알카에다의 테러 첩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전쟁은 국방부가, 첩보는 CIA가, 방첩은 FBI가’라는 식의 칸막이를 최소화하고, 이들을 통합해 업무를 조율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절감한 것. 그 결과물이 2004년 출범한 국가정보국(DNI)으로, 각 기관의 정보기능을 감독하는 것은 물론 실질적인 정보 예산의 결정권과 통제권까지 갖는 최고기관 신설이었다.
8월 20일 북한의 서부전선 포격 도발과 관련해 ‘지하벙커’로 불리는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에서 열린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진 제공 · 청와대
정말 통과를 원했다면
상황을 여기까지 정리해놓고 보면 시선은 김관진 안보실장에게 모인다. 테러방지법 문제가 그리도 중요하다는 게 청와대 측 판단이라면, 돌파구의 키를 쥐고 있는 안보실은 왜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일까. 앞서 설명했듯 이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른 후에도 청와대는 여당 측과 별달리 상의한 바가 없고, 안보실은 논의선상에도 오르지 않았다는 게 정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관계자들의 말이다. 대통령선거 기간 박근혜 후보 캠프에 조언했던 한 전직 고위인사는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안보실보다 아래인 국정원이 ‘안보실은 안 되고 우리가 맡는 게 맞다’고 나선 모양새”라며 “정부 조직의 생리를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안보’의 의미를 지극히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은 당국자들을 포함해 전문가들이 공히 지적하는 박근혜 정부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외교와 통일정책, 경제와 사이버까지 모두 포괄하는 이 말을 유독 박 대통령은 국방과 군사 분야만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해 사용한다는 것. 통일·외교·정보 정책도 총괄해 조정해야 옳은 안보실장이라는 자리가 흡사 이명박 정부 시기의 위기관리실처럼 남북 간 군사적 위기 상황만 담당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비판도 연원이 깊다. 안보라인의 상당수가 군 출신으로 구성돼온 그간의 인사 패턴 역시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 틀 때문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앞서 전직 고위인사의 말이다.
정갑윤 국회 부의장(오른쪽)이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복면 금지 등’ 발의 기자회견을 마친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 들어 국정원은 자신들이 컨트롤타워를 맡아야 해외 정보기관과 교류가 원활해진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공교롭게도 현재 안보실의 가장 약한 고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해외 교류다. 원래 이 자리는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주요국 최고지도자 안보 보좌진과 핫라인을 구축해 상시적인 연락체계를 구축해야 옳은 자리지만, 지금 안보실은 이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게 당국자들의 불만 중 하나다. 김관진 실장의 경우 지난해 부임한 이후 각국 카운터파트를 한두 차례 만난 정도가 전부다. 차기전투기(FX) 사업 혼선 등으로 여러모로 수세에 몰린 김 실장이 이후에도 여러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결기 넘치는 모두발언을 남긴 11월 24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14일 민중총궐기 집회에 모인 복면 쓴 시위대를 IS 테러리스트와 비교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외신들마저 놀라움을 표한 이날의 발언은 이튿날 새누리당 소속 정갑윤 국회 부의장이 대표 발의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으로 이어졌다. 치안당국이 질서 유지를 할 수 없는 집회·시위의 경우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는 복면 등의 착용을 금지하는 것이 그 골자다.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당국 고위직을 지낸 인사의 말이다.
“테러방지법이 국정원 위상 강화로 이어지면 국내 사찰에 악용될 수 있다는 게 반대하는 이들의 가장 큰 의심 아닌가. 대통령이 정말로 테러를 염려한다면, 그래서 조속한 테러방지법 통과를 원하고 있다면 국내 정치 사안을 테러와 연결 짓는 건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다. 이제 정부가 테러 위협을 강조할수록 정치적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게 됐고 입법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정작 야당이 ‘흘린’ 기회로 돌파구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기나긴 14년’만 되뇌고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청와대 역시 무능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본다. 안보 관점에서만 봐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