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에 한 이 한마디를 지키지 못했다. 재정적자와 상·하원을 점령한 민주당의 압박으로 증세를 해야 했던 부시는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증세는 세계 어디에서나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저출산·고령화로 복지 지출의 급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박근혜 정부 역시 이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고려 속에서 나왔다. 단어 그대로의 뜻만 놓고 보면 모순형용에 가깝지만 박근혜 정부는 2013년 발표한 ‘공약가계부’에서 세출 구조조정과 직접적인 증세가 아닌, 비과세·감면제도 정비 같은 ‘간접적’인 세입 확충을 통해 이를 달성하겠다고 공언했다. 방향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임기 중반을 넘어가는 현재, 중간 성적표는 낙제점에 가깝다. 국가채무는 역대 최고기록을 경신하고 있는데 정부가 스스로 한 공약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상황은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취임 이후 3년 연속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했다. 2016년 정부 예산안 통과를 위해 국회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10월 27일 시정연설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을 비롯한 공공, 노동 부문 개혁의 성과를 자랑하면서 “내년은 우리 경제의 개혁과 혁신이 한층 심화되고 혁신의 노력들이 경제체질을 바꿔 성과가 구체화되는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채무 GDP의 40% 넘을 전망
지난 2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 중인 박근혜 대통령. 대통령은 당시 회의에서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을 철회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의 재정 건전성의 척도가 되는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37조 원으로 2009년 이후 최대 규모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정부의 재정 지출 관리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국가채무가 2019년 800조 원에 이르면서 GDP의 43%에 달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14년 기준 34.5%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113.8%에 비해 양호한 수준이기는 하다. 그러나 1100조 원에 이르는 ‘시한폭탄’ 가계부채 등을 고려하면 국가채무는 언제든 순식간에 악화될 수 있다. 일례로 스페인은 2008년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내년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40.2%였다 2013년에는 92.2%로 단 5년 만에 폭증한 바 있다.
집안이나 나라나 살림이 건전해지려면 쓰는 돈보다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쓰는 돈을 줄이거나 벌어들이는 돈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쓰는 돈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저출산, 고령화, 소득 양극화 심화 등으로 복지 지출 급증은 피할 수 없는 추세다. 정부의 ‘2015~2019년 국가재정운용 계획’에 따르면 2019년까지 총지출은 연평균 2.6% 증가하는 반면, 같은 기간 내 보건·복지·고용 분야 지출은 연평균 5.0% 증가할 전망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신규 복지제도가 도입되거나 기존 복지사업이 확대되면서 다른 분야에 비해 보건·복지·고용 분야의 지출 증가세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2016년 정부 예산안의 총지출은 올해에 비해 3%밖에 늘지 않았다. 이는 정부가 예상한 내년 경제성장률인 3.3%보다 낮은 수준이다. 정부 예산안이 발표된 뒤 ‘이게 무슨 확장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
지출 증가율이 그리 높지 않은데 국가채무가 더 악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수입이 더 형편없어졌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총수입은 2.4% 늘어나는 데 그친다. 불경기는 하나의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기업 부문과 가계 부문 간 소득 양극화,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가계의 소비 증가세 둔화, 다국적기업의 확산에 따른 법인세 절세 전략 확대, 자산시장 부진에 따른 자산세수 위축’ 등의 ‘구조적 요인’ 또한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구조적 문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라의 세금 수입은 앞으로도 계속 악화일로를 걸을 전망이다.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성장을 둔화하게 만들어 세입 기반을 약화시킨다. 소득 양극화가 심해지면 소득이 낮아져 세금을 면제받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현 제도를 유지한 채로는 재원 조달이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며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세입 확충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졸속 행정·입법 근로자 절반 면세자
10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2016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에 대한 공청회에 참가한 전문가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인 세입 확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관건은 어디서 어떻게 세입을 확충할 것인지다. 야당 의원들은 법인세 인상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정부 여당은 경제활성화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거부하는 분위기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도 이날 열린 공청회에서 “경제가 돌아가려면 법인이 국내에 들어오고 해외에서 투자가 들어와야 하는데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구조상 법인세를 높게 가져가서는 경제가 돌아가기 어렵다”고 발언했다.
윤 연구위원은 법인세보다 소득세와 소비세에서 세입을 확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전반적인 소득세 부담 구제는 면세점이 높고 임금근로자의 평균(납부세액)도 OECD의 다른 회원국과 비교할 때 많이 낸다고 보기 어렵다.”
1600만 명을 넘는 우리나라 근로소득자로부터 근로소득세에서 세입을 확충하는 방안이 환영받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근로소득자의 절반가량이 세금을 내지 않고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이 발표한 보고서 ‘연말정산 파동이 남긴 과제 및 대안 : 2014년 귀속 근로소득 연말정산 자료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13년 세법 적용 당시에는 23.7%였던 면세자 비중이 2014년 세법 적용 이후 45.7%로 급증했다. 이후 ‘연말정산 파동’으로 올해 5월 추가 보완책이 적용되면서 48.2%까지 늘었다. 게다가 소득 상위 30%에 달하는 근로자의 실효세율은 2013년 2%대였으나 연말정산 추가 보완책이 적용되고 나서는 1%대로 떨어졌다. 소득 상위 30%에 해당하는 근로자의 연소득은 대략 7000만~7500만 원. 이 정도의 소득자가 실제로 내는 세금도 1%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말정산 파동 이후 소득세 체계의 왜곡은 더욱 심화됐다. 전체적인 실효세율은 높아졌는데 연소득 5500만~7000만 원의 고소득층에게도 세액공제 혜택이 추가로 부여돼 오히려 ‘서민증세 부자감세’를 불러왔다. 김상조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납세자 가운데 연소득 3000만~4000만 원대 구간에 해당하는 근로자의 실효세율 상승 폭은 연소득 5000만~7000만 원대 근로자보다 더 높았다.
김상조 소장은 보고서에서 “국민개세주의 원칙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민개세주의란 모든 소득자는 최소한의 납세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뜻한다. 2013년 전체 근로소득자의 3분의 1 수준이던 면세자 비중이 2014년에는 2분의 1 수준으로 치솟은 점을 지적하면서 김 소장은 “진보진영의 ‘부자·대기업 증세’가 근로소득자의 절반을 면세자로 만들고 대다수 근로소득자의 실효세율을 터무니없이 낮게 만들어버린 것을 합리화하는 핑곗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급여가 최저임금 수준을 넘는 근로소득자에게는 최소한의 세금(월 1만 원)을 부과하는 ‘근로소득세 최저한세’ 도입을 제안했다.
국가재정은 악화되고 있지만 복지 예산을 줄이기란 어렵다. 새정치민주연합 관계자들은 10월 18일 국회 본청 앞에서 ‘복지정책후퇴 저지 결의대회’를 가졌다.
하지만 정치권의 관심은 법인세에 머물러 있다. 야당은 가계소득에 비해 기업소득이 늘어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법인세 인상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반면 경제활성화를 전면에 내세운 여당은 총세수입에서 법인세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들며 법인세 인상을 반대한다. 이미 충분히 세금을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영국 등 몇몇 선진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낮은 편이다(그래프2 참조).
특히 법인세에 대해서는 형평성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같은 소득이 발생해도 개인사업자와 법인 사이 세율 차이가 큰 것이 그중 하나다. 개인사업자의 최고 소득세율은 연소득 1억5000만 원 초과일 경우 38%가 적용된다. 법인의 경우에는 최고 법인세율이 22%(지방세 제외)인데 그조차도 연소득 2억 원 이하일 경우 10%로 떨어진다. 그래서 개인사업자의 소득이 1억 원이 넘어가면 법인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개인사업자냐 법인이냐의 차이로 세율이 28%p나 차이가 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국회예산정책처의 ‘2015년 세법개정안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이후 법인세 비과세 및 감면 비중이 증가하면서 현행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과세표준 200억 원 초과 기업의 실효세율은 2008년 21.5%였으나 2014년 17.3%로 떨어졌다. 2013년 이후 대기업 부문의 비과세·감면제도 정비에도 실효세율 상승은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법인세의 비과세·감면제도가 대기업에 편중됐다는 지적도 중요하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안민석 의원은 8월, 2014년 신고 전체 법인세 감면액 총 8조7000억 원 가운데 7조1000억 원이 상위 1% 법인에 집중돼 있다고 밝혔다. 상위 10% 법인에서 전체 순이익의 87.2%가 발생하는 반면, 전체 조세감면 혜택의 96.3%를 가져가는 것으로 안 의원은 분석했다. 안 의원은 “조세감면 혜택이 재벌기업에 집중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라기보다 조세감면제도 자체가 잘못 설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기획재정부의 2015년 세법개정안을 들여다보면 빈틈투성이다. 개정안은 한동안 이슈가 됐던 업무용 승용차에 대한 과세 강화와 연구개발(R&D) 비용 세액공제의 대상 범위 축소, R&D 설비투자 세액공제율 하향 조정 등으로 향후 5년간 법인세 부문에서 총 2398억 원의 세수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계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행정부의 ‘꼼수’가 숨어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업무용 승용차 과세 강화에서 발생하는 법인세 세수 효과의 절반에 해당하는 1463억 원이 사실상 소득세수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법인세 세수 효과는 2398억 원이 아닌 935억 원으로 대폭 감소하게 된다. 더 강력한 법인세 부문 비과세·감면제도 정비가 불가피한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법인세 부문 가운데 가장 감면 규모가 큰 R&D 비용 세액공제율(현행 40%)을 축소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증세 논의 앞서 조세 형평성 제고해야
정부가 근로자들을 위한 제도랍시고 이번 세법개정안에서 제시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대한 세제 지원을 따져보면 그 혜택이 고스란히 고소득자와 자산가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김유찬 홍익대 경영대 교수는 “매년 2000만 원의 금융자산을 이 계좌에 가입해 5년 이상 누적 금액을 이 계좌에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득상위계층의 근로자, 즉 자산가 계층”이라고 의견서에서 밝혔다. 이 정책에 5년간 투입할 나랏돈은 1조6212억 원이다.
증세는 여느 정부라도 부담스러운 정책결정이다. 많은 전문가가 증세가 필요한 때라며 정부를 비판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정책 기조만 탓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정부가 스스로 내놓은 정책 기조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데 있다. 직접적인 증세를 피하고 비과세·감면제도 정비, 지하경제 양성화 등으로 세입을 확충하겠다는 것이 이 정부 출범 당시 내놓았던 ‘공약가계부’의 골자였다. 정부의 ‘2015~2019년 국가재정운용계획’ 또한 마찬가지 계획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약가계부의 중간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비과세·감면제도 정비의 경우 2012~2015년 세법개정에 따른 2013~2017년 세수 순증가 규모는 공약가계부의 계획이던 18조 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35%) 6조3000억 원에 그칠 것으로 국회예산정책처는 예상했다. 조세지출 항목 중 일몰이 도래한 항목에 대해서도 종료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일몰 종료될 계획인 항목은 항목 수로 따지면 88개 중 19개지만 금액으로 따지면 2.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규모가 큰 조세 지출 항목은 거의 대부분 연장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공적인 것은 지하경제 양성화로 2013~2014년 목표의 107%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는 세무조사 강화에 힘입은 바 크다. 기업의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 있으며 이후 불복청구로 행정 비용만 늘어날 여지도 있다.
증세를 논하기 앞서 비과세·감면제도를 정비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여론이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근로소득자의 절반이 세금을 아예 안 내는 상황에서, 상위 1% 법인들이 조세감면 혜택의 81%를 독차지하는 상황에서 조세 형평성에 대한 논의를 건너뛰고 곧바로 증세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증세는 커다란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각자 부담할 수 있는 선상에서 조세 형평성을 확립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선결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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