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억 원으로 추산되는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놓고 벌어진 금융감독원(금감원)과 생명보험사(생보사) 간 갈등이 장기화될 조짐이다. 삼성생명으로부터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제기받은 즉시연금 계약자 A씨가 자신이 금감원에 진정한 민원을 취하하면서 이 소송은 일단 불발됐지만, 삼성생명은 조만간 유사한 민원을 제기한 고객을 상대로 두 번째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 나설 예정이다.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지급하라’는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분쟁조정위)의 결정을 불수용한다고 선언한 한화생명은 해당 민원인이 법적 소송에 나서면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즉시연금 미지급금 논란에서 생보사 측 대표 격인 삼성생명과 한화생명 모두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모양새다.
한편 금감원은 보험업계를 대상으로 즉시연금 미지급금 규모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하고자 대대적인 현장 검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305만 원 → 138만 원
즉시연금 미지급금 논란은 강모 씨로부터 시작됐다. 2012년 9월 10억 원을 내고 삼성생명의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한 강씨는 삼성생명이 보험 가입 당시 약속한 2.5% 최저보증이율에도 못 미치는 보험금을 지급하고 있다며 금감원 분쟁조정위에 매달 최소 208만 원(1,000,000,000원×0.025÷12개월)의 연금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민원을 제기했다.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이란 목돈의 보험금을 한번에 납부하고 그다음 달부터 매달 보험사 공시이율에 해당하는 연금을 지급받다 만기 때 보험금(원금)을 돌려받는 상품이다. 공시이율이란 보험사의 운용자산 이익률, 국고채 등 외부지표 수익률 등을 반영해 산출하는 이율이다.강씨는 2012년 10월부터 1년간 삼성생명으로부터 매달 305만 원을 지급받았지만, 이후 연금액이 259만 원, 250만 원, 184만 원으로 줄어들다 2016년 10월부터는 그 금액이 138만 원으로 대폭 줄었다(그래프1 참조). 이에 대해 삼성생명 측은 저금리 영향으로 공시이율이 크게 낮아진 데다, 만기 때 돌려줘야 하는 보험금을 만드느라 매달 지급하는 연금이 최저보증이율에도 못 미칠 수 있다고 해명했지만, 분쟁조정위는 그런 내용이 약관에 제대로 설명돼 있지 않다며 삼성생명 측이 강씨에게 미지급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삼성생명은 해당 결정을 수용해 강씨에게 1500만 원을 지급했다.
삼성생명은 강씨에 대한 분쟁조정위 결정은 받아들였지만, 금감원의 ‘일괄구제’ 방침은 거부했다. 삼성생명 이사회가 이 사안에 대해 법적 판단을 받아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삼성생명은 8월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강씨와 유사한 민원을 금감원에 제기한 A씨를 피고로 해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냈다. 삼성생명의 즉시연금 전체 가입자는 5만5000여 명으로, 금감원에 따르면 삼성생명이 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즉시연금 미지급금이 4200억 원에 달한다(그래프2 참조).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동아일보 장승윤 기자]
법원이 삼성생명의 손을 들어주면 삼성생명을 포함한 보험사들은 ‘8000억 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대로 법원이 보험계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면 금감원은 일괄규제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미 금감원에는 상당한 민원이 접수된 상태라 법정 공방전은 조만간 재개될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미흡한 약관에 있다.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은 일시 납부한 보험금에서 사업비 등을 제한 금액, 즉 순보험료에서 만기 때 지급할 보험금(원금) 마련을 위한 재원(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을 제한 금액에 공시이율을 곱해 매달 연금을 지급한다. 만약 1억 원을 보험금으로 내 10년 만기 상품에 가입했고 사업비가 500만 원이라면 순보험료는 9500만 원이 된다. 보험사는 고객에게 10년 뒤 만기 때 500만 원을 더해 10억 원을 지급해야 하므로 이 500만 원을 마련하고자 매달 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을 조금씩 떼어내 적립해야 한다. 저금리 등의 여파로 공시이율이 낮아질수록 그 금액은 높아지는 구조다.
그런데 삼성생명 등의 즉시연금 약관에는 이러한 만기보험금 지급재원 내용이 게재돼 있지 않다. 금감원 분쟁조정위는 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이 거론된 보험사의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 산출방법서’가 “보험사 내부의 계리적 서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약관대로 계산해 미지급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즉시연금은 2013년 비과세혜택 폐지가 확정되면서 2012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금감원은 ‘즉시연금보험 절판마케팅 주의하세요’란 제목의 소비자 경보를 발령했을 정도다. 그때 나온 즉시연금 관련 홍보물이나 언론기사에도 만기보험금 지급재원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 ‘처음 낸 보험금을 만기 때 그대로 돌려받는다. 매달 연금을 지급받는데, 그 금액은 공시이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공시이율이 최저보증이율 이하로 떨어지더라도, 최저보증이율을 적용해 연금을 준다’고 돼 있다.
금감원 결정에 보험사들은 “보험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결정”이라고 볼멘소리를 낸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금감원 결정은 만기환급금 지급재원을 떼지 말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만기 때 돌려줘야 하는 고객의 원금을 보험사 돈으로 메워주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약관 부실, 보험사가 책임져야”
당사자들이 금감원 분쟁조정위 결정을 수용하면 ‘재판상의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 당사자가 수용하지 않기로 하면 해당 사안은 법정으로 간다. 한화생명은 자사 즉시연금 가입자 B씨가 낸 민원에 금감원 분쟁조정위가 미지급금 지급 결정을 내린 데 대해 8월 9일 금감원에 ‘불수용 의견서’를 제출했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B씨가 이 사안으로 소송을 제기하면 법정에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보험사는 사업비로 먹고사는데, 약관 표기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고객에게 돌려주라는 것은 보험의 일반적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보험사들의 ‘강행’ 방침을 바라보는 외부 시선은 따갑다. 보험계약자가 부당하게 받지 못한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기한은 3년이다. 피해를 인지해도 3년이 지난 상태라면 법적으로 구제받을 길이 없다. 아직 일괄구제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없다. 보험계약자들은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험사의 즉시연금 소송전을 지켜보다가는 법적 구제 시기를 놓칠 공산이 크다.
김창호 국회입법조사처 경제산업조사실 입법조사관은 “보험사들이 약관을 부실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판단을 법정에 가서 받으려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큰 문제”라며 “기본적으로 약관을 부실하게 만든 보험사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8월 초까지만 해도 80여 건이던 즉시연금 관련 민원 건수가 8월 중순 300건을 넘어섰다. 금융소비자연맹이 추진하는 즉시연금 미지급금 관련 공동소송에는 150여 명의 원고가 모였다. 또 하나의 치열한 ‘보험금 분쟁’이 이제 막 개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