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극단 청우]
이 코끼리들은 오후 공연의 홍보 퍼레이드를 하는 라오스산 코끼리 9마리 중 6마리로 주변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비둘기 떼에 놀라 철제 담장을 부순 뒤 정문 앞 광장으로 달아났다. 코끼리 6마리는 혼잡한 도로를 활보하고 음식점에 난입해 유리를 파손하기도 했다.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코끼리 활극’에 시민들은 혼비백산했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이 사건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줬고, 전혀 다른 장르의 블랙코미디 연극과 어린이동화 소재로 사용됐다. 동화 속 코끼리들은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밀림생활이 아닌,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얽매인 사슬 너머의 자유를 갈망한다.
반면 연극 ‘그게 아닌데’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진실이 뭔지 알려 하기보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결론 내리는, 소통이 단절된 인간들의 속살을 그리고 있다. 코끼리들의 도심 난입사건으로 조련사(윤상화 분)는 탈출 과정과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그는 오리를 보고 놀란 비둘기들에게 자극받아 코끼리 5마리가 탈출했다는 일관된 진술을 되풀이하고 있다. 조련사는 겁에 질린 코끼리들이 딸과 애인, 아들, 할머니를 보고 싶어 뛰쳐나간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음탕한 의도로 코끼리들을 탈출시켰다고 생각하는 정신과 의사(유성주 분)와 정치적 음모로 1년 전부터 계략을 꾸몄다고 믿는 형사(한동규 분)는 자신들만의 확신에 가득 차 있다.
모두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논문연구에 끼워 맞추려고 조련사를 성도착증에 걸린 자의 행동분석 사례로 진단하고, 형사는 조련사가 선거유세 현장에서 난동을 부리도록 코끼리들을 훈련시켜 상대 진영의 선거운동에 큰 지장을 주려 했다며 진술을 강요한다. 여기에 그의 어머니(문경희 분)까지 합세해 그가 어릴 때부터 동물을 풀어주는 것을 즐겼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 때마다 조련사는 “어, 그게 아닌데”만 되풀이할 뿐이다. 아들이 보고 싶어 탈출한 코끼리(강승민 분)를 만난 조련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깨닫는다.
2012년 초연했을 당시 주요 연극상을 휩쓸 정도로 주목받았던 ‘그게 아닌데’는 연출자 김광보의 노련한 관록이 돋보인다. 특히 조련사 역할을 맡은 윤상화의 어눌한 연기에서 분출되는 강렬한 에너지는 관객을 숨죽이게 만든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은 오늘 하루 몇 번이나 ‘그게 아닌데’를 되뇌었는지 마음속으로 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