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인데 흙수저라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인생이 짧다.” 국내 최초로 두유(베지밀)를 개발한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이 99세 때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가 10월 9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17년 황해도 은율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2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목욕탕 청소부, 모자가게 사환 등 궂은일을 해야 하는, 말 그대로 ‘흙수저’였다.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전환점은 15세 때 평양 기성의학강습소에서 교재를 복사하는 일을 한 것. 하루 3000장 넘는 의학교재를 복사하며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책임감이 만든 ‘베지밀’
그는 복사하고 남은 종이들을 집에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학력으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사전을 찾아가며 의학책을 읽어나갔다. 처음에는 하루 한 쪽 읽기도 어려웠으나 1년이 지나자 50쪽 이상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사고시에 도전한 그는 1937년 19세에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최연소 기록이었다.같은 해 그는 견습 의사로 명동성모병원 소아과에서 일하게 됐다. 어느 날 생후 100일도 안 된 아기가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 왔다. 우유나 모유를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를 연거푸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병원의 어떤 의사도 이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해 결국 아기는 사망하고 말았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허망하게 떠난 아기를 보며 젊은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정 회장이 아기가 숨진 원인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뒤였다. 1960년 유학길에 오른 그는 6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에서 유당불내증에 관한 연구 논문을 읽게 됐다. 논문에 따르면 유당불내증이란 모유나 우유에 함유된 유당 성분을 소화하지 못하는 병으로, 이 병에 걸린 신생아는 영양실조로 결국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이후 유당불내증 치료약 개발에 매달린 그는 1966년 유당이 없지만 영양소가 풍부한 콩으로 만든 두유를 개발하고, 식물성 우유(Vegetable Milk)라는 의미를 담아 ‘베지밀’이라고 이름 붙였다. 국내 최초로 치료법이 생기자 전국에서 유당불내증 환자가 몰려들었다. 가내수공업으로는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자 정 회장은 73년 대량생산이 가능한 설비를 갖추고 정식품을 설립했다.
1984년 세계 최대 규모의 두유 생산공장을 충북 청주에 짓고 이듬해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두유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86년부터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콩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고인은 84년 설립한 ‘혜춘장학회’를 통해 33년간 2350명에게 총 21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99년에는 평생 콩 연구에 매진한 점을 인정받아 국제대두학회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졸기(卒記)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