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들과 집에 모여 맥주 11병을 나눠 마셨어요. 다 다른 종류로 사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군’ 품평하며 마셨는데, 색다른 재미가 있더군요.”
40대 직장인 홍모 씨의 얘기다. 이날 홍씨 장바구니에 들어간 맥주는 전부 수입산이었다. 수천 원대부터 최고 3만 원이 넘는 것까지, 다양한 맛과 향과 병 디자인의 맥주가 그와 친구들의 저녁시간을 채웠다.
한때 수입맥주는 젊은 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맥주 하면 ‘카스’와 ‘하이트’밖에 모를 듯한 40대 이상 남성 직장인 사이에서도 수입맥주가 인기다. 중식당에 가면 ‘칭따오’를 주문하고 횟집에서는 ‘아사히’를 마시는 등 음식에 따라 맥주를 달리 선택하는 분위기도 확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맥주가 과거 와인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얘기도 나온다. 마시고 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나름의 멋과 이야기를 가진 취향 문화의 중심이 됐다는 뜻이다.
국산맥주의 문제는 ‘무미’가 아니라 ‘무재미’!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인과 만남에서 건배주로 맥주를 택한 것도 이런 변화 흐름을 보여준다. 요즘 한국인 사이에서 맥주, 그것도 다소 특이한(‘강서’ ‘달서’ 같은) 맥주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제법 매력 있게 보인다는 걸 청와대가 간파한 셈이다.문제는 이 흥미진진한 맥주 문화의 변화상에 국내 주류기업의 맥주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6월 말 롯데마트는 올 상반기 맥주 판매량 집계 결과를 발표했다. 수입맥주의 시장점유율이 51.1%로 국산맥주를 앞지른 것이 확인됐다. 이마트, 홈플러스 등 다른 대형마트 역시 최근 앞다퉈 수입맥주 인기에 대한 통계 자료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3년 3월 이후 주류업체 출고량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다. 업체 간 과당경쟁이 국민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형마트 판매량 집계는 맥주시장 변화 추이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자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 지표가 일관되게 ‘수입맥주 약진’을 보여주고 있다.
각종 국가기관 자료도 이를 뒷받침한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1년 5만9000t 수준이던 우리나라 맥주 수입량은 2014년 11만9500t으로 늘어난 데 이어 2015년 17만t, 지난해 22만t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맥주 수입에 지불한 비용도 2011년 5800만 달러(약 653억7760만 원)에서 지난해 1억8200만 달러(약 2051억5000만 원)로 5년 만에 3배 이상 많아졌다.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올해 일사분기 맥주 수입량도 6933만5490ℓ에 달한다. 분기 기준 사상 최대치다.
이처럼 절대량이 커지면서 수입맥주는 빠른 속도로 점점 더 많은 한국인에게 다가가는 모양새다. 롯데마트가 올 상반기 자사의 수입맥주 매출이 생수 매출을 추월했다고 발표한 게 한 사례다. 이 기간 롯데마트 생수 매출은 전년에 비해 10.1% 증가한 반면, 수입맥주 매출은 142% 늘었다. 생수 가격이 수입맥주보다 훨씬 저렴한 만큼 절대량으로 따지면 여전히 생수 판매가 더 많다. 하지만 2013년 수입맥주 매출이 생수의 60% 수준이던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수제맥주펍 ‘히든 트랙’을 운영하는 정인용 대표는 이처럼 많은 이가 수입맥주의 매력에 빠져든 이유로 ‘다양성’을 꼽았다. 그는 “한때 외국 언론인 한 명이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고 말해 화제가 됐는데, 사실 그동안 우리 맥주에 부족했던 건 맛이 아니라 다양성이었다. 당시 화제가 됐던 북한 ‘대동강맥주’와 우리나라 ‘카스’를 마시며 ‘맛 차이’를 논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는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던 건 온통 비슷비슷한 맥주밖에 없어 ‘마시는 재미’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수입맥주 인기가 치솟는 이유는 그것이 한국 맥주시장에 바로 이 재미를 가져다줬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수제맥주 전문점이 증가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필라이트’가 열어젖힌 새로운 시장
이런 변화가 국내 맥주업계에 실질적 위협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 우리나라 맥주시장 변화를 설명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대형마트에서의 판매량이다. 업소 판매량은 뭍 위로 드러나지 않는 게 보통이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 맥주시장은 크게 유흥시장(업소)과 가정으로 양분된다. 이 중 유흥시장 쪽에서는 아직 국내 주류업체의 시장점유율(마켓 셰어)이 압도적으로 높다. 거의 100%에 가깝다고 할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수입맥주가 가정용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식당, 술집에서는 ‘카스’(오비맥주), ‘하이트’(하이트진로), ‘클라우드’(롯데주류)를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요즘 ‘혼술’ ‘홈(집)술’ 문화 확산으로 가정용 맥주 매출이 증가세에 있긴 하나, 아직은 전체 맥주업계에서 유흥시장 쪽 비중이 높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국내 업체들이 수입맥주의 공습에 별달리 대응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데는 이런 배경도 있다. 국내 맥주업체 3사 중 압도적 1위(점유율 60% 이상 추정)인 오비맥주는 상대적으로 더욱 느긋하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과거 하이트맥주가 ‘천연암반수’ 마케팅을 앞세워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한 데서 알 수 있듯, 맥주업계 판도는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국산맥주가 지금처럼 화제성 밖에 머물다 보면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내년 1월부터 미국 맥주에 붙는 관세가 사라지고 7월에는 유럽연합(EU)에서 수입하는 맥주에도 무관세가 적용되는 등 맥주업계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지는 것도 변수다. 편의점업계의 ‘수입맥주 4캔 1만 원’ 마케팅 등에 따라 그렇잖아도 가격경쟁력을 잃고 있는 국산맥주와 수입맥주 간 격차가 더욱 좁아질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맥주업계 2, 3위의 행보에 최근 관심이 쏠린다. 각각 ‘필라이트’(하이트진로)와 ‘피츠 수퍼클리어’(피츠·롯데주류)라는 신제품을 내놓으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라서다. 요즘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보면 필라이트와 피츠 시음기가 자주 눈에 띈다. 두 제품을 같이 마시고 비교·분석기를 올리는 누리꾼도 적잖다. 이에 대해 “그동안 수입맥주의 전유물이던 맛, 향기, 패키지 분석 대상에 국내 업체 맥주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라는 의견이 많다.
두 신제품 가운데 ‘선공’을 날린 쪽은 4월 25일 출시된 발포주 필라이트다. 발포주는 맥아 함유량이 10% 미만이라 주세법상 ‘기타주류’로 분류된다. 엄밀히 말해 필라이트는 맥주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친숙한 맥주맛과 특유의 청량감 덕에 대중은 필라이트를 맥주로 인식한다. 현재 필라이트가 대중의 주목을 받는 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발포주여서가 아니라, 1만 원에 12캔을 줄 만큼 ‘가격 대비 성능’(가성비)이 높은 ‘맥주’여서다. 이영 하이트진로 상무는 “우리나라 맥주시장이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수입맥주에 맞설 수 있는 카드를 고민하다 발포주를 떠올렸다. 발포주는 일본 내 매출액이 맥주의 55% 수준에 이를 만큼 인기 있고, 하이트진로는 2001년부터 일본 시장에 발포주를 수출해왔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필라이트를 대중에 각인시킬 첫 수단은 ‘가격’으로 정했다. 기타주류인 덕에 주세율이 일반맥주(72%)의 절반 이하(30%)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가격 책정이 가능했다. 이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가벼움을 느껴보라’는 뜻의 이름(필라이트)을 붙이고, ‘말도 안 되지만…’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캠페인을 펼쳤다. 제품 레이블에는 꼬리에 풍선을 단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코끼리 캐릭터 ‘필리’를 그려 넣었다. 이 역시 가격이 깜짝 놀랄 만큼 가볍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그동안 수입맥주의 색다른 매력에 빠졌던 대중은 기존 국산맥주와 다른 필라이트의 마케팅에 뜨겁게 ‘응답’했다.
하이트진로에 따르면 필라이트는 가정용만 판매하고 있는데도 출시 두 달 만에 1000만 캔 판매 돌파 기록을 세우며 맥주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중이다. 구매자 사이에서 ‘가성비 갑’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재구매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하이트진로는 5~6월 생산량이 수요를 못 따라갔다는 판단에 따라 7월 이후 생산량을 대폭 늘렸다. 발매 초기와 비교하면 출고량이 10배 이상 늘었다는 후문이다. 그동안 맥주시장 점유율 30% 초반대에 머물러왔던 하이트진로는 필라이트가 일삼분기 실적 개선의 견인차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피츠’, 정통 맥주의 반격
6월 1일 대중에 공개된 피츠 역시 한 달 만에 1500만 병 판매를 돌파하며 맥주업계에 파란을 일으키는 중이다. 피츠는 롯데주류가 ‘클라우드’ 뒤를 이어 선보인 정통 맥주로, 클라우드 출시 당시 화제를 모은 ‘오리지널 그래비티 공법’을 적용해 깊은 맛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리지널 그래비티 공법은 맥주 발효 후 물을 첨가해 도수를 맞추는 ‘하이 그래비티 공법’과 달리 발효한 맥주 원액을 그대로 제품화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롯데주류는 클라우드 출시 당시 이를 ‘물 타지 않은 맥주’라 설명했고,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술을 빚었다. 또 자체 개발한 고발효 효모 ‘수퍼 이스트’를 사용해 발효도를 90%까지 끌어올림으로써(일반 맥주 발효도 80~85%) 잡미가 거의 남지 않는, 이른바 ‘끝까지 깔끔한 맛’을 추구했다. 피츠 제품명의 ‘수퍼클리어’는 이를 표현한 것이다. 김조일 롯데주류 홍보팀장은 “피츠는 에둘러가지 않은 ‘맥주 중 맥주’다. 맛있는 진짜 맥주로 다른 맥주들과 정면승부하겠다는 뜻이 담긴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롯데주류는 이를 통해 맥주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다.
롯데주류는 국내 맥주업계 3위 기업이지만 시장점유율은 5%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우드와 피츠의 화제성에 비해 매출은 크게 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김 팀장은 “그동안 공장규모가 작아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기존 롯데주류 맥주 생산량은 연간 10만㎘ 수준으로, 클라우드가 인기를 끌면서 생산량 거의 전부가 판매돼는 상황이 됐다. 현 시장점유율이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셈”이라며 “8월부터 충북 충주의 2공장이 정상 가동되면 이런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밝혔다.
국산맥주 쌍끌이 시대 열리나
롯데주류가 약 7000억 원을 투자해 세운 제2맥주공장의 생산 규모는 제1공장의 2배 수준이다. 이 공장이 100% 가동되기 시작하면 현재 물량난을 겪고 있는 클라우드와 피츠 유통이 정상화되면서 롯데주류의 시장점유율이 빠르게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요즘 주당 사이에서 ‘끝 맛이 깔끔해 폭탄주용으로 마시기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있는 피츠 브랜드가 더 많은 업소에서 노출될 경우 롯데주류의 시장점유율 상승 목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 주류업계 1위인 오비맥주는 2014년 글로벌 주류기업 AB인베브에 인수되면서 사실상 외국 회사가 됐다. 버드와이저, 스텔라 아르투아, 호가든, 코로나 등 수입맥주 브랜드 30여 개를 보유하고 수입맥주 유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도 하다. 오비맥주가 국내에서 생산하는 카스를 ‘해외맥주’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오비맥주의 성공을 국내 주류업계의 성공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가 잇달아 좋은 신제품을 내놓고 업계 점유율 증대를 꾀하는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했다.
주류업계에서는 필라이트와 피츠가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시돼 비교 대상이 되고 있을 뿐, 실체는 전혀 다른 술이라고 입을 모은다. 주종부터 특장점과 주요 공략 대상까지 겹치는 게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홈술족’을 타깃으로 삼은 가정용 발포주 필라이트와 ‘소맥시장’에서 영향력 확대를 모색 중인 피츠가 서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쌍끌이에 나서, 한동안 수입맥주에 밀려 맥을 못 추던 국내 맥주업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어주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좋은 맥주를 즐기는 게 멋의 상징이 된 세태에서 필라이트와 피츠, 나아가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의 승승장구가 계속될지 많은 이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또 다른 맥주전쟁 시작될까 한국 최초 맥주기업은 ‘동양맥주’(현 오비맥주)와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였다. 일제강점기 운영되던 일본 맥주회사가 1950년대 초반 민간에 불하되면서 문을 연 두 기업은 지난 60여 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펼치며 국내 맥주업계를 이끌어왔다. 초반 40년은 오비맥주의 확연한 우세였다. 그런데 88 서울올림픽 이후 국내 맥주시장이 성장하면서 양사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고, 93년 하이트진로가 ‘지하 150m 천연암반수 맥주’ 마케팅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1위를 차지했다.
오비맥주는 99년 진로 인수 뒤 ‘카스’ 브랜드를 앞세워 다시 순위를 역전했다. 2014년 ‘클라우드’를 내놓으며 맥주시장에 진입한 롯데주류는 아직 매출이 많지 않다. 하지만 ‘물 타지 않은 맥주’ 등 마케팅의 화제성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냈고, 최근 공장 증설로 추가 생산 여력도 확보했다. 이에 따라 막강 유통망을 갖춘 롯데주류가 맥주시장의 주목할 ‘플레이어’로 떠오른 참이다.
‘전통 강자’ 오비맥주가 건재한 상황에서 하이트진로가 발포주 시장에 새로 깃발을 꽂고, 롯데주류가 약진을 도모하는 게 현재 국내 맥주업계 구도다. 바야흐로 시작될 맥주업계 3파전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많은 이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