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0

2015.08.10

창의 인재 간 데 없고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

5·31 교육개혁 후 부실 대학 양산…경제 발전 1등 공신에서 개혁 대상으로

  • 송화선 기자 spring@dogna.com

    입력2015-08-10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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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낙후지역이었다. 제국주의의 수탈로 발전이 지체됐거나(한국·중국·싱가포르), 전범국이자 패전국으로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일본). 이후 70년 만에 동아시아 각국이 이룬 경제 성장은 괄목할 만한 수준이다. 그 배경에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 교육시스템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최근 동아시아 교육제도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간동아’는 한국 대학교육의 현황을 진단하고 일본, 중국, 싱가포르 대학들을 분석한 영문계간지 ‘글로벌 아시아’ 최신호 기획특집을 번역, 소개한다.

    “우리는 지금 창의성을 갖춘 인재가 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중고생들은 과도한 입시 위주 교육에 시달리고 있고, 대학생들은 현장과 동떨어진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과중한 교육비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8월 6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 ‘경제 재도약을 위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이날 담화에서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특히 대학이 사회의 수요에 맞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구조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대학을 개혁 대상으로 지목한 게 처음은 아니다. 7월 27일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도 ‘대학이 취업적합형 인재를 배출할 수 있도록 구조를 고쳐나가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10월 말까지 세부 전공별 중·장기(5~10년) 인력수급전망을 제시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여러 직업군에 종사하는 근로자 실태조사를 통해 사회가 원하는 전공을 역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과별 필요 정원을 추정해 대학이 반영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교육부가 3월 27일 ‘대학과 취업 현장의 미스매치’ 문제를 거론하며 ‘PRIME(PRogram for Industry needs Matched Education) 사업’ 추진 계획을 발표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PRIME 사업의 골자는 산업계의 요구에 맞춰 학사구조를 잘 개편한 대학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창의 인재 간 데 없고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
    기업이 원하는 인재 양성?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의 대학개혁 방향이 이처럼 정원 감축과 취업률 제고에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많은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 이 중 상당수가 졸업 후 취업하지 못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과도한 입시경쟁과 학자금 대출 급증, 고졸 인력 부족으로 인한 중소기업 채용난 등 각종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도 지적된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주범으로 1995년 ‘5·31 교육개혁’을 꼽았다. ‘5·31 교육개혁’은 기존 교육계 관행을 대폭 혁신하며 현재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바탕을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다(상자기사 참조). 이 가운데 대학교육 시스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건 대학 설립 준칙주의와 대학 정원 자율화 정책이다.

    대학 설립 준칙주의는 학교 대지와 교수 등 최소 설립 요건을 갖추면 대학 설립을 인가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대학 설립 계획에서 최종 설립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했으나, 이를 완화한 것이다. 또 정부는 이때부터 비수도권 사립대의 경우 최소한의 조건을 넘어서면 자율적으로 정원을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정책 논의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이미 학령인구 감소가 예상되던 상황이라 대학 수와 학생 정원을 늘리는 데 교육부가 반대 의견을 냈다. 하지만 교육개혁위원회가 대입 병목 현상에 따른 교육 고통 해소, 시간제(part-time) 학생 제도 활성화를 통한 근로자 교육기회 확충 등을 이유로 들며 강행했다”고 밝혔다. “대학자율화는 문민정부가 추진하는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대중교육의 장’이 됐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행하는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1995년 187만8225명이던 대학생(일반대, 전문대, 산업대) 수는 2000년 274만9293명으로 5년 사이 90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2008년 83.8%까지 치솟았다. 1996년 134개였던 전국 대학 수도 2014년 189개가 됐다.

    문제는 이들 대학 중 상당수가 심각한 부정이나 비리 등으로 폐쇄 처분을 받았고, 운영 중인 학교 가운데도 ‘학자금대출 제한대학’이나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 등으로 지정된 부실 대학이 적잖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5·31 교육개혁 이후 상당수 대학이 정원을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고, 교육 여건도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27.6명으로 OECD 평균 15.8명의 2배에 가깝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대학 경쟁력 조사에서도 우리나라는 비교 대상 60개국 가운데 53위에 그쳤다. 같은 해 국가경쟁력 26위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창의 인재 간 데 없고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
    국제경쟁력 갖춘 창의융합대학

    창의 인재 간 데 없고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
    이 때문에 우리나라 대학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많은 이가 공감한다. 정부는 2013년 대학 설립 요건을 강화하면서 대학 설립 준칙주의를 폐기했고, 이듬해에는 정원 감축이라는 칼도 뽑아 들었다. 전국 대학을 5개 등급으로 구분하고, 평가 결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원을 감축해 2023학년까지 총 16만 명을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교 졸업생 수는 2013년 63만 명에서 2023년 40만 명으로 줄어든다. 현재 56만 명인 대학 입학 정원을 유지할 경우 상당수 대학이 고사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원을 줄이고 취업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학 개혁이 추진되는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지방대 교수는 “취업률이 대학평가와 직결되고, 그 결과에 따라 정부 지원금 규모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대학은 학생들의 취업률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나쁜 성적을 삭제한 ‘취업용 성적표’를 별도 발급하거나, 복수전공을 통한 ‘전공 세탁’을 허용하는 등 교육과정을 파행적으로 운영하는 사례도 빈발한다”며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대학교육의 질은 더욱 떨어지고, 학교는 직업훈련소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도 “기업 맞춤형 인재 양성과 정원 축소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현행 대학 구조개혁은 대학의 개성을 빼앗고 동질화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주도하는 대학 구조개혁과 더불어 대학의 자율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공세적, 적극적 구조개혁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영국문화원은 자체 보고서를 통해 ‘2020년 무렵에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베트남, 나이지리아 등 신흥성장국의 고등교육 수요가 크게 증가해 유학생이 급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머지않아 선진국 간 유학생 유치전이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때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대학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보경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는 “현재 세계 유학생의 절반 이상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캐나다 등 6개 나라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는 유학생에게 본국 학생보다 더 비싼 등록금을 받는다. 이미 세계 각국이 유학생 유치를 위한 무한경쟁에 돌입한 상황”이라며 “우리나라도 해외 우수 유학생 유치를 위한 세계 수준의 대학 육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교육부가 진행 중인 ‘학부교육 선도대학 육성사업(Advancement of College Education·ACE)’은 이를 위한 공세적 구조개혁의 한 사례로 꼽힌다. ‘잘 가르치는 대학’을 선정, 지원하는 이 사업을 통해 성균관대는 학과와 전공 사이 ‘담벼락’을 없앤 ‘자기설계융합전공’을 운영 중이다. 학생이 대학에 개설된 모든 과목 가운데 희망 강의를 자율적으로 취사선택해 들으며 스스로 전공을 만들어나가는 프로그램으로 현재 신경미학, 엔지니어링디자인 등 창의적인 전공이 만들어진 상태다. 동국대 역시 ACE 지원금으로 총장 직속의 교양교육 중심기관 ‘다르마칼리지’를 운영하는 등 교육 실험을 하고 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이제 대학의 미래는 인재 확보, 융·복합 시너지 창출, 글로벌 경쟁력 등으로 판가름 날 것”이라며 “대학들이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 분야를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한 학사구조를 갖추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쪽으로 교육개혁의 방향이 정해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5·31 교육개혁 20년의 반성

    문민정부의 ‘열린교육’은 왜 실패했나


    창의 인재 간 데 없고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
    1995년 5월 31일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을 발표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2년간 4차례에 걸쳐 발표된 23개 분야 120여 과제에 이르는 일련의 교육 관련 정책을 통칭해 ‘5·31 교육개혁’이라 부른다.

    열린교육체제, 수요자 중심 교육, 자율과 경쟁, 교육의 다양화와 특성화, 교육정보화 등을 골자로 한 이 ‘교육개혁’의 방향은 지난 20년간 우리 교육의 근간이 됐다.

    김영삼 정부(1995년 12월~1997년 8월)와 노무현 정부(2003년 12월~2005년 1월)에서 두 차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는 5월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이라는 책을 펴내며 ‘(당시) 정책 창안자들은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수월성 교육에 역점을 두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런 방향이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 기조를 교육에 도입해 사교육비 급증, 입시경쟁 심화, 대학 부실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교육계에서는 현재 우리 교육이 처한 각종 문제를 해소하려면 ‘5·31 교육체계’를 발전적으로 대체할 새로운 교육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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