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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유승민 대표직 잃고 차기주자 얻나

인지도 높아지고 합리적 보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배신의 정치인’ 낙인은 부담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유승민 대표직 잃고 차기주자 얻나

유승민 대표직 잃고 차기주자 얻나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유승민 의원이 7월 8일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났다. 형식은 그를 원내대표로 선출한 새누리당 의원들이 모여 그의 사퇴를 결의하고 이를 유 의원이 수용한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과정을 되짚어보면 대통령의 ‘6·25 국무회의 발언’ 이후 친박근혜(친박)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내 일부 의원이 앞장서고, 김무성 대표와 다수 의원이 동조함으로써 사실상 그를 원내대표직에서 끌어낸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행정부 수반의 말 한마디에 입법부 과반 의석인 원내 제1당 소속 의원들이 자기 손으로 뽑은 원내대표를 끌어내리는 삼권분립 훼손 현장을 지켜봐야 했다. 세간에서는 박 대통령이 즐겨 본다는 ‘동물의 왕국’에 비유해 ‘여왕벌의 날갯짓을 신호로 동료 일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대표 일벌을 쫓아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유 의원은 원내대표 사퇴의 변에서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제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행정부 수반의 뜻에 따라 입법부 구성원들의 손에 의해 원내대표직에서 끌어내려지는 것을 목도한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이자 유권자인 국민은 그런 그를 엄호하고 나섰다.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던 그를 일약 유력 차기주자로 밀어 올린 것.

2보 전진 위한 1보 후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7월 13일과 14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여야 차기 대선주자 8명의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지지율 9.0%로 4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5월과 6월 조사에서 각각 0.4%와 1.6%에 그쳤던 그가 한 달 만에 9.0%로 지지율이 크게 오른 것은 원내대표 사퇴 파동과 무관치 않다. 유 의원은 지지정당별로는 무당층, 정치성향별로는 중도층, 지역별로는 수도권, 광주·전라, 대구·경북(TK), 연령별로는 40대와 50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에 앞서 7월 10일 공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여권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6월 조사에서 5.4% 지지율에 불과하던 유 의원이 한 달 만에 13.8%p 급등한 19.2%로 1위를 기록했다. 지역별로 대구·경북(26.3%), 광주·전라(27.7%), 대전·충청·세종(23.9%)에서 1위에 올랐다. 그의 정치적 고향인 TK는 물론, 호남과 충청에서도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유승민 대표직 잃고 차기주자 얻나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는 “원내대표라는 ‘직’은 비록 잃었지만 정치인으로서 인지도가 높아진 점, 청와대 요구를 수용한 김무성 대표와의 차별성이 부각된 점, 현재권력인 대통령에게 탄압받는 이미지로 동정여론이 생긴 점, 그리고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국회 원내대표 연설 등을 통해 합리적 보수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점 등 ‘원내대표 사퇴 파동’ 국면에서 정치적 자산을 더 많이 챙긴 유승민 의원이 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영어 단어 ‘forget’은 ‘잊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잊다’는 ‘잊히다’와 달리 능동 의미를 내포한다. 지금 갖고 있는 것, 해야 할 일 등을 ‘잊다’ ‘잊어버리다’라고 해석되지만, forget이 담고 있는 속뜻을 이해하면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영어 forget은 ‘for+get’으로 이뤄진 단어다. 지금 갖고 있는 것, 해야 할 일을 ‘잊다’라는 표면적인 뜻 속에는 ‘기득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아직 얻지 못한 그 무엇을 얻기 위한 적극적 행동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전략이 forget에 담겨 있는 셈. 대통령 말 한마디에 집권여당이자 원내 제1당 원내대표직을 잃은 유승민 의원에 대해 비록 원내대표직은 잃었지만 차기주자를 얻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은 이유다.

유승민 의원은 앞으로 어떤 정치 행보를 걷게 될까. 정치 전문가들은 “당분간 의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잠행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종훈 시사평론가는 “내년 총선 결과에 따라 유 의원을 주목하는 국민이 늘어날 것”이라며 “본격적인 유승민 정치는 총선 이후에 하게 될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만약 총선 결과가 새누리당에 나쁘게 나온다면 그것은 국민으로부터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외면받은 방증일 수 있다”며 “그런 상황에서는 구원투수가 필요할 텐데, 현재권력의 지시에 순응한 김무성 대표 체제보다 소신과 원칙, 강단을 보여준 가능성 있는 인물에게 기대를 걸려는 국민이 많아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이후 마땅한 차기주자가 없는 TK와 보수층에서 총선 이후 유 의원에게 더 많은 눈길을 보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내년 총선 이후가 아니라 총선 전에라도 유승민 의원이 다시 전면에 부상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유 의원은 재무건전성이 좋은 상품”이라며 “때가 되면 블루칩으로 떠오를 유망주”라고 말했다. 최 부소장은 “무당층과 합리적 진보, 합리적 보수층이 주목한다는 점에서 단기적으로는 등락이 있을 수 있지만, 총선 전 주가(지지율)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으로 급등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19대 총선을 넉 달여 앞둔 2011년 말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 여론이 극도로 나빠지자, 고육지책으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출범했던 과거 사례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

재무건전성 좋은 블루칩

최 부소장은 “유 의원이 현재 권력인 대통령과 싸우지 않으면서도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국민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며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고 새누리당에 대한 국민 여론이 나빠지면 총선 전에라도 구원 등판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사자는 어린 사자를 절벽 아래로 굴려 떨어뜨린다고 한다. 위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해지고 용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유 의원을 어린 사자로 여긴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국정철학과 거리가 먼 정치 훼방꾼으로 여겨 찍어낸 것일까.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격언 가운데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4월 소나기가 5월의 꽃을 데려온다)’가 있다. 한자성어로는 ‘고진감래(苦盡甘來)’다. 현재권력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낙인이 찍혀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난 유승민 의원의 다음 행보에 시선이 집중된다.



주간동아 2015.07.20 997호 (p10~11)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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