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2

2015.06.15

고소, 시원한 맛에 더위가 훅~

서울의 콩국수

  • 박정배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5-06-15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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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 시원한 맛에 더위가 훅~

    서울 중구 ‘진주회관’의 콩국수.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밀가루 음식은 별종에 속했다. 면은 주로 메밀로 해 먹었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여름에는 우물물을 길어 만든 콩국에 밀가루 면을 말아 먹었다. 콩의 고소함과 우물물의 시원함, 밀가루 면의 매끈함이 더해진 콩국수 한 그릇은 따듯한 밥을 주로 먹는 한국인에게 최고 여름 별식이었다. 콩국수는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음식이다. ‘여름을 탄다’ ‘더위를 먹었다’고 말하는 증세를 한의학에서는 서중(暑中)이라 하는데 콩국수는 이를 이겨내게 해주는 대표적 음식이다.

    콩국수에 관한 조리법은 19세기 말 쓰인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나온다. ‘콩을 물에 불린 후 살짝 데치고 갈아서 소금으로 간을 한 후에 밀국수를 말아 깻국처럼 고명을 얹어 먹는다’는 구절이다. ‘콩국수’란 단어가 직접 언급된 책은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1923년 판)이다. 이후에도 콩국수란 말보다 콩국이란 말이 더 많이 쓰였다. 콩국에 대한 기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236년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대두즙(大豆汁)을 끓여’라는 구절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콩국을 얘기할 때 조선 중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백과사전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것으로 유명한 이익은 18세기 귀농(歸農)의 선구자였다. 인생 후반부를 경기 안산(성호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 1735년 그는 삼두회(三豆會)라는 모임을 결성한다. 그가 농사지은 콩으로 콩죽과 콩나물, 된장을 만들어 그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즐기는 모임이었다. 그에게 콩은 서민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천금 같은 식재료였다. 책에 ‘천하다. 하지만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는 콩만한 게 없다. 서리가 내려 콩이 죽지 않으면 행지(幸之·다행스러운 일)’라고 쓸 정도였다. 조선 농민들은 실제 콩국에 밀국수를 말아 먹으며 더운 여름을 이기고 살아왔다.

    중구 태평동 삼성본관건물 뒤에는 서울 콩국수를 말할 때 첫손으로 꼽는 ‘진주회관’이 있다. 강원도 황태(黃太)를 진하게 갈아 넣은 콩국은 죽에 더 가깝다. 황태의 노란색이 콩국에 그대로 녹아 있어 황금색을 띤다. 밀가루와 콩가루, 감자가루를 섞은 면발도 쫀득하면서 고소한 맛이 난다. 국물과 면발이 진하고 진득하지만 간이 잘 맞고 시원해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 음식 맛에 빠져 한 그릇 먹다 보면 더위가 저만큼 달아나 있다. 여의도에 있는 ‘진주회관’도 같은 맛을 낸다. 같은 집안사람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고소, 시원한 맛에 더위가 훅~

    서울 태릉입구역 ‘제일콩집’의 콩국수.

    서울 지하철 6·7호선 태릉입구역 인근에 자리 잡은 ‘제일콩집’의 콩국수도 이름이 높다. ‘제일콩집’은 콩국수는 물론, 청국장 같은 두부 관련 음식을 거의 다 파는 두부전문식당이다. 투명한 유리대접에 약간 노란색이 감도는 콩국수 한 그릇이 나온다. 오이채 몇 점과 약간의 깨가 고명의 전부다. 녹색 면이 간간이 섞인 흰색의 얇은 면발이 불투명한 하얀색 콩국물 속에서 소리 없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신다. 진하고 깔끔하다. 콩물은 주문과 동시에 갈기 때문에 콩과 물 사이에 생긴 커다란 기포들이 숨을 쉬듯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반드시 콩은 하룻밤 물에 불렸다 매일 아침 전기 맷돌에 갈아 낸다. 그래서일까, 콩물에서 고소한 뒷맛이 강하게 난다. 땅콩이 들어가야 나는 맛인데 콩만으로 이 맛을 낸다고 한다.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냉면과 달리 콩국수는 여름에만 파는 집이 많다. 여름은 그래서 이래저래 콩국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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