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5

2015.04.27

비판과 대안 부족한 일본 싱크탱크

되살아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꿈…‘자유로운 의견 모이는 지식공동체’ 추구

  • 워런 스타니슬라우스 일본재건이니셔티브 연구원 번역 · 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입력2015-04-27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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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과 대안 부족한 일본 싱크탱크

    일본 대기업 본사가 밀집한 도쿄 마루노우치(왼쪽)와 정부 각 부처 청사가 모여 있는 가스미가세키.

    돌이켜보면 최근까지 일본 싱크탱크의 기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본에서 ‘정책집단’이라는 말은 고스란히 정부 관료사회를 의미할 뿐이고, 이들은 정책을 연구하고 형성하는 과정에서 독점적인 권한을 누려왔다. 외부의 누군가가 이 과정에 끼어들 공간은 거의 없었다. 정부 각 부처 청사가 모여 있는 도쿄 가스미가세키 지역이 사실상 일본의 싱크탱크였던 셈이다.

    2014년 발표된 세계싱크탱크지표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내 싱크탱크 수는 108개로 세계 9위다. 미국과 중국, 유럽 선진국은 물론, 인도나 아르헨티나보다도 적다. 일본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특히 다른 G20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보잘것없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싱크탱크의 사회적 구실이 얼마나 미미한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일본 싱크탱크의 절대 다수는 정부나 기업의 부속기관이다. 준 구니하라 캐논국제학연구소 연구주임은 이들을 각각 ‘가스미가세키 타입’과 ‘마루노우치 타입’이라고 부른다(마루노우치는 일본 대기업 본사가 밀집해 있는 비즈니스 지구). 후원하는 정부부처나 기업에 정보와 데이터, 분석자료를 제공하는 게 이들의 기본 임무다. 하지만 이러한 의존성 짙은 지식 인프라로 정부 정책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검토를 내놓기 어렵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가스미가세키와 마루노우치

    정책 대안을 제시할 연구기관들 간 경쟁도 거의 없다. 이러한 경쟁구도 자체가 아예 환영받지 못하고 그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독립적인 싱크탱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냉전이 끝나고 일본 경제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이래, 싱크탱크의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는 작업이 일본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중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됐다.



    특히 외교정책과 안보정책을 비정부 차원에서 연구할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게 주목받았다. ‘독립적 싱크탱크’라는 새로운 모델은 관련 정책 대안이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는 과정을 통해 국제사회의 물주 구실에 머물고 있는 일본 특유의 ‘수표책 외교(checkbook diplomacy)’를 넘어 국제적 입지를 강화할 소프트파워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명분을 얻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에는 ‘잃어버린 20년’이라 부르는 경기 침체를 끝내고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해 일본의 쇠락을 막는 거대한 작업을 감당하기에는 집권 자민당의 정책이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 대안을 찾아보자는 요구가 커지면서 자민당의 정책 형성 주도권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현상 유지에 급급한 정치권에 대한 환멸은 2009년 일본 민주당의 총선 완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 최대 야당인 민주당 역시 현실성 있는 정책 대안을 내놓기보다 희망사항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2012년 민주당은 실각했고, 현재도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다.

    비판과 대안 부족한 일본 싱크탱크

    일본 근대화 운동가이자 교육자로 게이오대 창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 1835~1901). 가와무라 기요오가 그린 그의 초상이다.

    몇몇 독립적 성격의 싱크탱크가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에도, 미국이나 유럽 싱크탱크 수준의 영향력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문제의 중심에는 정부 관료 주도의 정책 형성 과정에서 싱크탱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취약하다는 한계가 자리한다. 전 세계적으로 비정부기구(NGO)가 사회적, 국제적 환경 조성에서 상당한 구실을 하고 있는 트렌드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시히로 나카야마 게이오대 교수는 “일본이 최소한의 국익을 지켜내려면 글로벌 아이디어 시장과 국제 환경을 결정짓는 규범 형성 과정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최근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워싱턴에서 영향력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움직임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향방을 두고 각국이 벌이는 새로운 경쟁구도 속에서 일본이 능동적인 대응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중국이나 한국과 비교하면 특히 공식 로비의 영역 밖에서 이뤄지는 활동에서 일본은 소극적이다. 싱크탱크를 비롯해 NGO나 다자기구의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비공식 영역이야말로 관련 정보를 빠르게 획득하고 다양한 접촉 채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만, 주변국들에 비해 일본의 소프트파워는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전 세계에 걸쳐 격렬히 펼쳐지고 있는 경쟁의 장에서 일본은 소외됐고, 이 때문에 미래 번영이나 국제사회와의 관계 역시 위태롭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위기다.



    지식공동체의 복원 움직임

    2011년 3월 지진, 쓰나미, 원자력발전소 붕괴로 이어진 재난은 20년에 걸친 일본 쇠락의 정점을 찍었다. 이 사건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위기는 일본 사회 내부의 침체 분위기와 결함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필자가 속한 독립적 싱크탱크 일본재건이니셔티브(RJIF)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됐지만, 이 사건의 피해를 복구하는 활동에만 그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20년’에 걸친 위기의 근본 원인과 구조를 해부함으로써 일본 사회 전체를 재건할 방안을 제시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침체된 정책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 싱크탱크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돼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몽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독립성’이야말로 시민사회에 꼭 필요한 기반이라고 믿었다. 철학자 쓰루미 ·#49804;스케가 1946년 ‘사상의 과학연구회’를 설립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였다. ‘사상의 과학연구회’는 시민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식인 모임이었고, 쓰루미는 ‘일본인의 생각에 근거한 민간 기반의 공공정책을 복원’하는 것만이 일본을 세계로 이끌 길이라고 믿었다.

    이들의 비전은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지식공동체의 꿈이었다. 오늘날 일본 싱크탱크들이 맡아야 할 몫이 바로 이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일본 정책공동체와 시민사회가 다시금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어 원문은 www.globalasia.org/article/seeking-an-independent-voice-japanese-think-tanks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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