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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

죽음 앞둔 백조의 애틋한 몸짓

레이버리가 그린 안나 파블로바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죽음 앞둔 백조의 애틋한 몸짓

죽음 앞둔 백조의 애틋한 몸짓

‘빈사의 백조’, 존 레이버리, 1911년, 캔버스에 유채, 198×146cm,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1910년 여름, 러시아의 천재적인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단 ‘발레뤼스’가 영국 런던을 찾았다. 발레뤼스의 탁월한 무용수 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끈 이는 프리마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브나 파블로바(1881~1931)였다. 런던 언론과 대중은 연일 그의 환상적인 춤에 찬사를 보내느라 바빴고, 주간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파블로바 특집 기사에 실을 초상화가 필요했다. 발레리나의 초상이라는 까다로운 작품을 의뢰받은 이는 아일랜드 출신 초상화가 존 레이버리(1856~1941)였다.

레이버리는 초상화 제작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파블로바가 여러 번 자신의 스튜디오에 와서 포즈를 취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행히도 발레뤼스가 석 달간 런던에 머물렀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모델과 화가가 모두 노력한 결과 파블로바가 프티파의 발레 ‘사계’에 출연한 모습의 초상화가 완성됐다. 이 초상화는 현재 레이버리가 성장기를 보낸 영국 글래스고의 캘빈글로브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첫 번째 초상화는 성공적이었지만,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이듬해인 1911년 10월 발레뤼스와 파블로바는 다시 한 번 런던을 찾았는데, 이번 방문에서 파블로바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발레 ‘빈사의 백조’를 선보여 첫 번째 방문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생상스의 ‘백조’에 맞춰 죽어가는 백조의 마지막 몸부림을 연기하는 ‘빈사의 백조’는 테크닉보다 섬세한 감정 연기로 승부했던 파블로바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레이버리는 ‘빈사의 백조’를 춤추는 파블로바의 초상화를 새로 제작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공연 일정 때문에 파블로바가 런던에 한 달밖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레이버리는 일단 발레 의상을 입은 파블로바의 상반신만 스케치했다. 그리고 파블로바가 떠난 후 그의 코스튬(무대에서 시대나 인물의 배역을 나타내는 의상)을 자신의 아내 헤젤에게 입혀 나머지 부분을 그렸다. 레이버리는 헤젤을 모델로 한 초상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파블로바가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발레리나라는 점에 있었다. 완성된 초상화를 본 파블로바의 남편 빅토르 당드르는 초상화 속 포즈가 아내와 달라 보인다고 말했다.

이 초상화에서 레이버리가 표현하려 한 것은 ‘빈사의 백조’의 분위기, 즉 죽음에 이른 백조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캔버스의 반 이상을 채운 어둠 속에서 발레리나의 흰색 코스튬과 분홍빛 토슈즈만 희미하게 빛난다. 그러나 이 ‘죽음을 앞둔 어둠’의 표현이 너무 과했던 듯, 그림이 공개되자 비평가들과 대중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경탄할 만한 초상화이기는 하지만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는 반응이었다. 파블로바와 ‘빈사의 백조’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대중이 더욱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만큼 영국에서 파블로바의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파블로바는 이 초상화가 공개된 해인 1912년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후 런던에서 발레단과 발레학교를 창단했으며 많은 영국 출신 발레리나가 이 학교를 통해 발레에 입문했다. 순회공연 중 폐렴에 걸려 50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파블로바가 네덜란드 헤이그 호텔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내 백조 의상을 준비해줘”였다.

이후 파블로바의 마지막 안식처는 고향 러시아가 아닌 영국이었다. 화장된 파블로바의 시신은 런던으로 돌아와 골더스 그린 묘지에 안장됐으며, 상반된 반응을 얻었던 초상화‘빈사의 백조’ 역시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돼 있다.



주간동아 2015.01.19 972호 (p75~75)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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