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8

2014.12.22

우크라이나 유혈 사태 1년 약속이 깨진 땅, 증오만 자라

우크라이나·몰도바·러시아 3개국 불온한 공기와 사람들

  • 키시너우·키예프·모스크바=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4-12-22 11:0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그때, 광장을 내려다보는 호텔 우크라이나 옥상 꼭대기에서 저격이 시작됐다.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광장 옆 언덕길에서 시위를 이어가던 이들이 총탄에 맞아 하나 둘씩 쓰러졌다. 상황은 인터넷 카메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수개월째 농성을 이어오던 군중이 사냥총과 개인화기로 반격에 나서고 서방 세계가 비난을 쏟아내자, 대통령은 결국 망명을 택했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한복판 독립광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유로마이단(Euromaidan) 혁명. 당시의 사건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유럽을 뜻하는 접두어에 광장이라는 의미의 현지어를 붙인 것이다. 지난해 11월 친러파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경제통합 논의 절차를 중단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 사태의 출발점이었다. 2월 18일 대통령과 핵심 관료들이 해외로 도피할 때까지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100여 명.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꼭 10년 만에 벌어진 정치적 격변이었다.

    동부 도네츠크 일촉즉발 상황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찾은 광장은 언뜻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충돌 과정에서 불타버린 남측 옛 노동청 건물만 보수 작업이 한창일 뿐,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다는 자동차 타이어 바리케이드는 말끔히 치워졌다. 다만 광장 곳곳에는 충돌 당시 모습과 사망자들을 담은 현장 사진이 촛불과 함께 놓여 있었고, 희생자가 많았던 200m 남짓한 언덕길은 이들을 기리는 꽃다발로 채워졌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영웅들에게 영광을!’ 광장 곳곳에 상업광고 대신 나붙은 추모 문구다.

    “외형상 시내는 안정화됐지만, 동부 도네츠크 상황은 여전히 일촉즉발입니다. 올해 9월 휴전이 선언된 후에도 심심찮게 교전이 벌어지고 있고요.”



    내전 발발 이후 서울에서 온 손님은 처음 맞는다는 설경훈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 대사의 말이다. 친러파 대통령이 축출되자 러시아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크림반도가 독립국가 수립을 선언했고, 역시 러시아계가 주민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 광공업지대에서도 정부군과 러시아계 반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됐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만, 이러한 상황 전개 배후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무력에 의해 국경이 바뀐 최초의 사례라는 크림반도 사태는 국제법과 약속을 통해 국가 간 질서를 유지해온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원칙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처참하게 보여주는 실례다. 총과 피로 서로의 공간을 빼앗고 빼앗기는 이전 세기의 냉혹한 지정학(geopolitics)이 날것 그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에트연방과 유럽연합. 우리말로 연방과 연합은 분명 다른 말이고 실제로도 차이가 큰 개념이지만, 러시아어로는 모두 같은 단어, ‘소유즈(Soyuz)’다. ‘우리도 유로화를 쓰는 유럽국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리는 동유럽 국가들에게 EU가 옛 소비에트연방의 정확한 대체재로 인식되는 배경이다. 폴란드와 체코 등 옛 소련 동맹국 10개 나라가 EU에 가입한 것이 2004년 5월. 이제 EU의 확장세는 소련에 속했다가 독립한 나라들로 향하고 있다. 까딱하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과 국경을 마주할 판인 러시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들의 서구화를 막아선다.

    ‘모스크바를 낳은 어머니 도시’로 불리는 키예프의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사이에는 파랑과 노랑으로 이뤄진 국기와 국가 문양이 걸려 있었다. 국가 상징물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의 변화다. 당시 경험이 키예프 시민들에게 ‘우크라이나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일체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국경과 정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국가라는 공동체’가 시민들의 피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돼가고 있음을 거리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유럽으로 가자” 시민들 믿음

    우크라이나 유혈 사태 1년 약속이 깨진 땅, 증오만 자라

    1월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키예프 독립광장 옆길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들이 놓여있다.

    우크라이나 국기는 위아래 파랑과 노랑으로 이뤄진 단순한 디자인이다. 공교롭게도 EU 깃발의 색깔(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별)과 같다.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깃발과 EU 깃발을 함께 흔들었다. “유럽으로 가자!”는 시위대의 주요 구호 가운데 하나였다. 정작 EU 가입국들은 옛 소련권 국가들의 섣부른 가입을 내심 반기지 않는 눈치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키예프 시민들의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러시아 제국주의에 맞서는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투쟁’이라는 선악구도가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실제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친유럽파로 불리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정치 지도자들 역시 독점과 부패로 부(富)를 쌓아 올린 이들이기는 마찬가지고, 키예프를 비롯한 서부 지역의 오랜 주도권에 동부 지역 러시아계 주민들이 만만찮은 차별을 겪어온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내전 배후가 누구냐는 질문과 별개로, 내전의 뿌리에는 또 다른 역사의 아픔이 숨어 있는 셈이다.

    키예프로부터 500km가량 떨어진 인구 400만의 농업국가 몰도바공화국의 수도 키시너우. 인터뷰 자리에 앉은 마르가레타 티모프티 대통령 영부인 역시 소련의 일부였던 몰도바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연방이 해체된 30대에야 독립국 몰도바로 국적이 바뀐 셈.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배우며 자랐을 그는 그러나 인터뷰에 배석했던 러·한 통역자를 활용하는 대신 루마니아어(현 몰도바 국어) 영어·한국어로 이중통역을 거치는 불편을 감수했다. 한 시간을 넘긴 인터뷰에서 러시아어는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몰도바공화국은 인터뷰 엿새 전인 11월 30일(현지시간) 총선을 치렀다. 판세는 그대로 동유럽의 지정학적 판도다. ‘2015년 유럽연합(EU) 가입’을 슬로건으로 내건 집권여당과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은 사회주의 성향의 야당연합. 결과는 득표율 44% 대 39%로 집권여당의 신승이었다. 친(親)유럽계를 대표하는 영부인이 러시아어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정치인의 아내일 뿐 정치인은 아니지만 개인 자격으로라도 할 말은 하겠다.” 몰도바 국민의 근면성과 예술성을 논하며 지루하게 이어지던 인터뷰는 현안이 튀어나오자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총선 유세 기간 가장 뜨거웠던 쟁점은 러시아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 문제. 이들의 자금이 야당 측에 지원됐다는 언론보도가 이어지고 해당 정당의 선거 참여가 일부 제한된 다음에야 집권여당은 가까스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총선 결과가 달랐다면 인터뷰가 진행된 호텔 지척의 광장은 키예프 마이단마냥 시위대로 가득 찼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부인은 “일부 동부 지역에 대한 러시아측의 개입 움직임은 분명한 사실이며, 염려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데다 여전히 러시아 지상군 부대가 주둔 중인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을 가리키는 언급이었다. 최근 서유럽 언론들이 ‘제2의 크림반도가 될 것’이라고 앞다퉈 보도하는 인구 20만 남짓의 군사 지역이다. 푸틴 대통령이 노려보고 있는 다음 목표물인 셈이다.

    세대 간, 지역 간 ‘갈등의 골’

    이날 아침 티모프티 영부인은 키시너우 중심가의 한 호텔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유라시아와 유럽 : 평화를 위한 대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국제활동 비정부기구(NGO)인 천주평화연합(UPF)이 마련한 행사였다. 통일교가 스스로 핵심 가치로 꼽는 문화 간 대화와 가정의 역할을 통해 동유럽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해법을 모색한다는 게 주제였지만, 내전 현장의 지척에서 열린 콘퍼런스의 참석자들 발언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국기를 꺼내 흔들며 러시아를 성토한 우크라이나 참석자의 격정적인 발제가 끝나자 러시아 측 참석자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부패 문제였을 뿐”이라고 되받았다. 내전 지역에서 양측이 벌인 가혹 행위와 희생자들의 사연 위로 푸틴을 히틀러에 비유하는 말들과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지도자’라는 반박이 이어졌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척이고 이웃인, 20여년 전만 해도 소련이라는 한 나라 국민이던 이들 사이의 갈등은 이방인 관찰자가 한눈에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있는 성질이 아닌 듯했다.

    갈등은 고스란히 나라 안에서도 세대 간의 골로 이어진다. 키시너우 기차역 가판대에 놓인 신문은 대부분 러시아 언론의 몰도바 지역판이다. 당연히 러시아어로 신문이 나온다. 그러나 TV를 틀면 루마니아어로 대부분을 방송하는 국영채널 외에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채널이 다수를 차지한다. 소련 시절의 향수를 간직한 기성세대와 영어 배우기를 생존 과제로 여기는 젊은 층 사이의 간극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결과가 분열된 시민사회고 양극화된 정치판이다.

    12월을 맞이한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는 흡사 마지막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강변에서 올려다본 크렘린은 휘황하게 빛나고, 붉은 광장은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마련한 놀이시설로 분주함이 더한다. 중심 거리 곳곳 건물마다 수놓은 조명과 장식은 서유럽 어느 나라의 수도 못지않게 화려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 축제가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자명했다.

    지난여름에 비해 국제유가는 3분의 2 선까지 주저앉았고 루블화는 절반 가까이 폭락했다. 원유 수출로 먹고사는 러시아로서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크림반도 사태에 대응한 서구의 경제제재가 겹치면서 러시아는 국가부도를 코앞에 두고 있다. 멋들어지게 리모델링한 스타니슬라브스키 오페라 극장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어깨를 움찔하며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궁핍과 가난에 익숙하다. 이 정도로는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 1998년 모라토리엄 당시 아직 어린아이였을 그의 표정에서 의아할 만큼 기묘한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아슬람벡 아슬라하노프 전 러시아연방 상원의원은 조지아(옛 그루지야) 출신이다. 옛 소련의 경찰공무원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북코카서스 지역에 대해 푸틴 대통령의 자문 역할을 오랜 기간 맡았다. “푸틴 대통령은 온 인생을 나라를 위해 바친 인물(man of state)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믿는다.”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 역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금전적 지원을 받아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넘쳤다. “미국은 언제나 자신이 옳고 러시아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늑대를 사냥하듯 궁지로 몰아대는 것은 오히려 서방국가들이다.”

    ‘힘 대결의 장’ 바로 우리 일

    우크라이나 유혈 사태 1년 약속이 깨진 땅, 증오만 자라

    마르가레타 티모프티 몰도바공화국 대통령 영부인(왼쪽). 레오니트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코앞까지 다가온 소련 시절의 영광, 이를 막아서는 미국과 서유럽, 그들의 사주를 받은 옛 형제국가들의 유럽화 움직임, 그로 인해 위태로워지는 러시아의 안보와 미래. 모스크바 전체에 가득한 이러한 인식 틀은 고스란히 푸틴 대통령의 생각이기도 하다. 크림반도 개입 등은 이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을 포함해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 조치였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국가 모두를 적으로 돌렸던 소비에트식(式) 세계관에서 사회주의만 들어내고 러시아 민족주의로 대체한 사고방식이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구가 만들어놓은 국제법 규범 대신 군사력도 얼마든 활용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현실주의다. 사회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대다수 러시아 국민에게는 익숙하고도 자명한 논리. 푸틴의 과감하기 짝이 없는 대외 개입 행보 이후 국내 지지율이 80%대까지 급상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많은 국제정치 전문가가 냉전의 부활, 지정학의 부활을 말하는 배경이다.

    최성수 우크라이나 대사관 공사참사관은 “문제는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힘이 교차하는 복판에 놓인 한국의 입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한미군 기지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중국 외교부가 공개적으로 항의를 퍼붓고, 양측이 각각의 다자 무역협정을 제안하며 한국의 팔을 잡아당기는 현재 상황은 그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말보다 힘, 약속보다 위협이 훨씬 자주 등장하는 현실이야말로 가장 염려스러운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속았다고 할 수 있다.” 키예프의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레오니트 크라프추크의 회한은 을씨년스러웠다. 옛 소련 최고회의 의장을 지내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해체를 주도한 3인 중 하나인 그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주요 국가들로부터 안보를 보장받은 94년 부다페스트 각서를 입안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반도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이 각서를 근거로 서방의 개입을 기대했으나 재정위기에 허덕이는 미국과 EU는 군사 개입을 사실상 거절했다. 크림반도를 점령한 사실상의 주체가 각서 서명국 중 하나였던 러시아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국가 간 약속이 이렇듯 허무하게 깨지는 것은 한국 같은 국가에게는 매우 심각한 의미가 있다. 북한의 핵 폐기를 어떤 당근으로 유도할 것인가.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훨씬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 정치인의 역설은 ‘모든 나라가 약속을 존중하는 세계의 중요성’으로 이어지지만, 오히려 짙게 남는 것은 ‘우리는 과연 약속을 마냥 신뢰해도 좋은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불안이다. 힘과 힘이 부딪치는 험악한 공간 속에서 ‘속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한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지정학의 시대’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고통스러운 숙제다.

    ‘유라시아와 유럽’ 콘퍼런스 주최한 UPF

    ‘동북대륙’으로 분류…인도주의 지원에 전념


    우크라이나 유혈 사태 1년 약속이 깨진 땅, 증오만 자라
    12월 6~7일 몰도바공화국 키시너우에서 ‘유라시아와 유럽 : 평화를 위한 대화’(사진)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를 주최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과 천주평화연합(UPF)은 고(故) 문선명 총재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동유럽 지역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소련 붕괴 즈음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과 만나 소련 청년들을 선발해 미국에서 연수하게 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취한 것이 대표적이다. 민감한 시점에 민감한 주제로 진행한 학술회의에 다양한 시각을 가진 각국 전문가가 함께 참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1960년대부터 동구권에서 활동해왔다는 통일교는 옛 소련 국가와 몽골 등 16개 국가를 묶어 ‘동북대륙’으로 분류한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의 활동 역시 선교와 비즈니스, 민간 비정부기구(NGO) 활동으로 크게 나뉜다. 우크라이나는 그중에서도 비교적 움직임이 활발한 나라라는 게 현지 관계자의 설명. 수 차례의 학술행사를 통해 서유럽과 러시아 세력 사이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해온 것 역시 그 일환이라는 이야기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한 직후부터 NGO 활동의 주축인 UPF는 이 지역의 전쟁 피해자들에게 후원금과 의약품을 모아 전달하는 작업을 꾸준히 전개해오고 있다.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하는 조력자도 적잖다는 설명. 다만 정부군과 러시아계 반군 사이에 특정 세력을 편드는 것으로 인식될 만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대신, 인도주의적 지원에 전념한다고 현지 관계자들은 말했다. 섣불리 오해를 살 경우 자칫 특정 국가 내에서의 활동 자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