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7

2014.12.15

유럽 지식인을 사로잡은 중년 남자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뮈스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2-15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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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지식인을 사로잡은 중년 남자

    ‘에라스뮈스의 초상’, 한스 홀바인 2세, 1523년, 73.6×51.4cm, 나무판에 유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평범한 듯하지만 묘하게 관심을 끄는 초상화다. 큰 코에 잘 발달된 턱을 가진 중년 남자는 담비 털이 덧대진 외투를 입고 느긋한 표정으로 빨간색 표지의 책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있다. 눈꺼풀이 처진 얼굴이 반듯하고 평온한 인상을 준다. 배경에는 고대 그리스풍 기둥이 서 있고, 다른 한편에는 선반에 쌓인 책들이 보인다. 이 ‘느긋한 남자의 초상화’는 네덜란드 사상가이자 작가인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를 그린 작품이다. 제법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년 전인 1523년, 유럽에 르네상스 물결이 막 퍼져나가던 시기에 그린 것이다.

    초상이 주는 신중해 뵈는 인상과 달리, 에라스뮈스는 당대 유럽에서 태풍의 눈 같은 논란의 주인공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세속적인 출세를 기대할 수 없었던 에라스뮈스는 일찍이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에 입문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곧 학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영국 헨리 8세는 그를 케임브리지대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했다. 에라스뮈스는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을 편집하고 다양한 내용의 대중서를 저술해 지식인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글을 써서 먹고산 최초의 문필가였으며, 당대 유럽에서 그의 영향력은 훗날 볼테르나 버나드 쇼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그저 유명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찍이 그리스어 고전을 해독하면서 예수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이 예수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성 소크라테스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소서!”라는 농반진반의 말을 하곤 했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대에 서기 충분할 만큼 위험한 발언이었다.

    교황청과 당대 가톨릭교회의 타락 및 부정부패를 비꼰 책 ‘우신예찬’은 에라스뮈스의 명성을 전 유럽에 퍼지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소설 형식을 빌려 쓴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은 상식보다 어리석음을 선호하고, 특히 바보 같은 사람일수록 더 똑똑한 척한다고 꼬집었다.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 책은 삽시간에 유럽 지식인 사이에 퍼졌다. 그리고 교회만 맹신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우신예찬’이 출간된 지 6년 만인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대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는 교황을 공격하는 95개 항의 질문서를 발표했다. 종교개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하던 화가 한스 홀바인 2세(1497?~1543)는 에라스뮈스 추종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홀바인은 ‘우신예찬’이 출판될 때 책에 들어가는 삽화 일부를 그리기도 했다. 홀바인은 1526년 헨리 8세의 영국 궁정에 처음 초빙됐는데, 이때 홀바인을 추천한 이가 에라스뮈스였다는 사실만 봐도 두 사람이 무척 막역한 사이였음은 분명하다. 이후 홀바인은 1532년 바젤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영국으로 이사했으며, 1543년 사망할 때까지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런던에 머물렀다.



    홀바인이 에라스뮈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초상화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초상화의 왼쪽 배경이 된 그리스풍 기둥은 에라스뮈스가 그리스어에 능통한 학자임을 암시하고, 군데군데 배치된 책은 이 초상화의 모델이 책을 쓰거나 읽는 직업을 갖고 있음을, 그리고 담비 털외투는 그가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인기 작가’임을 나타낸다. 홀바인은 자신의 그림 속에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사물을 배치해 보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주문자가 시키는 대로만 그림을 그리는 장인이 아니라, 초상화라는 지극히 객관적인 장르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줄 아는 지적인 면모의 예술가였다. 일견 평범한 듯한 이 ‘에라스뮈스의 초상’이 은근히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끄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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