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1

2014.11.03

평생 사랑을 갈구한 ‘몽마르트르의 뮤즈’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쉬잔 발라동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1-03 1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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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사랑을 갈구한 ‘몽마르트르의 뮤즈’

    ‘숙취 : 쉬잔 발라동의 초상’,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88년, 파스텔과 펜, 미국 보스턴 포그 미술관 소장.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서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시슬리 등 걸출한 화가들이 저마다의 재능을 뽐내고 있었다. 베르트 모리조, 메리 커샛처럼 남자 화가들과 동등한 기량을 과시한 여성 화가도 있었다. 그러나 쉬잔 발라동(1865~1938)은 모리조나 커샛 같은 몽마르트르의 여성 화가들과 조금은 다른 위치에 있는 듯싶다.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모델, 그리고 르누아르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드가 등 몽마르트르 화가들의 뮤즈이기도 했다.

    발라동이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건 아니다. 정물화와 초상화, 풍경화에서 발라동이 보여준 대담한 색채와 구도는 당시 몽마르트르 화가 그룹 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다. 발라동은 프랑스 국립예술협회가 정회원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여성 화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파리 퐁피두센터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발라동 작품이 소장돼 있는 것만 봐도 화가로서 그가 이룬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성공과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발라동은 아홉 살 때부터 서커스단 곡예사로 일했지만, 열다섯 살에 곡예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직업을 잃었다. 살길이 막막하던 그는 당시 빈민가인 몽마르트르로 흘러들어갔고,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르누아르가 그린 걸작 가운데 하나인 ‘부지발의 무도회’에서 볼에 홍조를 띤 채 남성 파트너의 어깨에 매달려 춤추는, 순진해 뵈는 아가씨가 바로 발라동이다.

    그는 여러 화가 중 르누아르에게 좀 더 특별한 감정을 품었던 것 같다. 한창 르누아르의 모델로 활동하던 1883년 발라동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낳았을 때 사람들은 르누아르의 아이가 틀림없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는 발라동의 친구인 위트릴로 집안에 입양돼 모리스 위트릴로라는 이름을 얻었고, 훗날 어머니처럼 화가가 됐다.

    열여덟 살에 미혼모가 된 발라동에게 그림을 가르친 건 툴루즈 로트레크였다. 그전부터 몽마르트르의 여자들을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던 이다. 발라동에게 ‘마리 클레망틴’이라는 본명 대신 ‘쉬잔’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도 그였다.



    발라동은 늘 사랑을 갈구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아들을 낳은 후 여러 사람과 사귀었고, 마흔여덟이 되던 1914년에는 스물한 살 연하인 화가 앙드레 우터와 결혼했다. 발라동은 화가로서 우터가 성장하도록 열심히 도왔으나 아들의 친구였던 우터와의 결혼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 20년 만인 1934년 이혼했고, 발라동은 4년 후인 1938년 일흔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많은 화가가 발라동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은 툴루즈 로트레크의 ‘숙취’가 아닐까 싶다. 전체적으로 노란빛이 감도는 이 파스텔화에서 발라동은 탁자에 기댄 채 지친 눈으로 바깥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테이블에는 반쯤 마시다 만 술병과 잔 하나가 놓여 있어, 이 여성이 숙취에도 또다시 술을 마시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림을 가득 채운 노란빛은 이틀 연속 술의 힘에 기대야 할 만큼 황량한 발라동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일생 동안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갈망하던 그의 내면을 이렇게나 잘 간파한 툴루즈 로트레크였지만, 정작 그는 발라동의 구애를 정중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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