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8

2014.10.13

1950년대 ‘비트세대’ 파격과 격정

존 크로키다스 감독의 ‘킬 유어 달링’

  •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4-10-13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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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비트세대’ 파격과 격정
    예술가의 삶은 그 자체로 영감을 주곤 한다.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소설이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작가 잭 케루악의 일대기이자 작품이기도 한 ‘온 더 로드’, 랭보와 베를렌의 열정적이면서도 금지된 사랑을 그린 ‘토탈 이클립스’, 이상과 그의 연인을 그린 ‘금홍아, 금홍아’ 같은 작품이 이에 속한다. 예술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삶과 사랑은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다.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못 파격적이며 격정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랭보와 베를렌은 시 세계도 파격적이지만 동성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 역시 파격적이었다. 아내를 매매춘에 나서게 하고 자신은 일본 도쿄에서 행려병자처럼 죽어간 1930년대 최고의 모던 보이 이상의 삶 역시 격정적이긴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비트세대의 상징이 된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의 청년기를 그린 영화 ‘킬 유어 달링’에 묘사된 젊음 역시 금기와 금지, 위반, 격정으로 일렁인다. 멀미 나는 청춘의 한 시기를 그린 영화라는 점에서 ‘킬 유어 달링’은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재구성인 한편, ‘몽상가들’이나 ‘여름 궁전’ 같은 청춘 영화의 계보를 잇기도 한다.

    영화는 이들이 비트세대라는 명칭을 얻기 전인 1944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시작된다. 대학에서는 압운과 각운, 소네트의 형식미를 가르치지만 학생들 생각은 좀 다르다. 앨런 긴즈버그는 운율에서 벗어난 휘트먼의 시는 왜 가르치지 않는지 교수에게 질문한다. 이에 대한 교수의 대답은 좀 실망스럽다. 지금까지 전통으로 지켜온 것에는 그럴 만한 가치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유를 설명하지도, 가치를 보여주지도 않은 채 강요하는 소네트의 형식이란 어쩐지 허전하다.

    이때 형식주의에 반감을 표하는 긴즈버그를 조용히 지켜보는 이가 있으니 바로 비트세대의 뮤즈가 된 루시엔 카다. 그는 질서나 규범을 우습게 여기며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주장한다. 잭 케루악이나 앨런 긴즈버그 같은 실존 문인들은 루시엔 카에 비해 오히려 상상력이나 도발성이 부족해 보인다. 루시엔 카는 그들 사이에서 뮤즈로 가볍게 날아다니며 새로운 시적 상상력을 건드린다. 그는 말하자면 위반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악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화자는 앨런 긴즈버그지만 주인공은 단연 루시엔 카다. 모두 실존인물이긴 해도 영화 속에서 마주하는 루시엔 카는 허구적 이미지로 증폭돼 있다. 데인 드한이 연기한다는 점에서 그 이미지는 더욱 강렬해진다. 마치 ‘토탈 이클립스’에서 소년기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퇴폐미가 극대화됐듯, ‘킬 유어 링’에서 데인 드한은 퇴폐적이며 파괴적인 이미지를 뽐낸다. 해리 포터의 이미지를 벗어낸 대니얼 레드클리프나 이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고뇌에 찬 소설가로 분했던 잭 휴스턴의 연기도 그럴듯하다. 그럼에도 데인 드한이 보여주는 불안과 매혹이 단연 눈길을 끈다.

    서사나 줄거리만 놓고 보면 ‘킬 유어 달링’에서 새로운 면을 찾기는 어렵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을 보자면 작가의 트라우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루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알 속의 시간을 깨고 나와 아브락사스로 거듭난다. 그들이 깨는 유년기 세계는 ‘달링’이라 불리는 달콤하고도 안락한 전통과 과거다. 달콤하면서도 아름다운 방황, 사실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일 테다. 그 아름다운 방황을 그린 영화가 ‘킬 유어 달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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