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1

2014.06.09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연상의 여인 상드와 함께한 작품 누군가 둘로 나눠 팔아 치워

  • 전원경 문화정책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06-09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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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쇼팽의 초상’, 외젠 들라크루아, 1838년, 캔버스에 유채, 46×38c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화가가 그린 예술가의 초상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가 그린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초상일 것이다. 낭만주의 화풍의 거장 들라크루아 앞에서 포즈를 취한 ‘피아노의 시인’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것은 이 초상화가 원래 피아노를 치는 쇼팽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리에 편히 앉아 화가를 응시하는 고전적 자세의 초상화가 아니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담았기 때문에 초상화 속 쇼팽은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동요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원래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동시에 담은 작품의 일부분이다. 그러니까 들라크루아는 하나의 캔버스에 쇼팽과 상드 두 사람을 모두 그린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초상은 둘로 분리돼 팔려나갔다. 초상화는 원래 쇼팽이 캔버스 오른편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고, 상드가 그 왼편에 앉아 연인의 연주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쇼팽과 상드는 19세기 중엽 파리 문화계에서 유명했던 ‘세기의 연인’이다. 상드는 쇼팽보다 6년 연상이었고, 남성 위주의 19세기 파리 사회에서 남장한 모습으로 살롱에 드나들며 소설가로 활동할 만큼 당찬 성격이었다. 인기 절정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으나 늘 병약한 데다, 폴란드 출신이라 파리에 가족이 없던 쇼팽은 연상의 여인 상드에게서 연인이자 어머니 모습을 발견했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지만 이들은 1838년부터 1847년까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발라드 4곡 등 쇼팽의 대표작들이 상드와의 동거생활 기간에 탄생했다. 그러나 쇼팽과 상드의 딸 사이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는 길을 택했고, 이 결별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쇼팽은 폐결핵으로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파리 화단에서 최고 낭만주의 화가로 손꼽히던 들라크루아를 쇼팽에게 소개해준 사람도 상드였다. 두 사람은 1838년 처음 만난 이후부터 쇼팽이 숨을 거둘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들라크루아가 쇼팽과 상드의 초상화를 그린 이유 역시 이 세 예술가가 서로 친한 사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들라크루아가 이 초상화를 그린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초상화는 들라크루아가 1863년 사망했을 때까지 그의 스튜디오에 보관돼 있었다. 만약 쇼팽이나 상드 둘 중 한 명이 초상화를 의뢰했다면, 완성된 초상화는 이 둘 가운데 한 명의 집에 보관돼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쇼팽과 상드가 결별한 후 각자 짐을 챙겨 다른 집으로 이사하면서 이 초상화가 갈 데가 없어지자 들라크루아 집으로 되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들라크루아가 자기 스튜디오에 피아노를 빌려다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튼 초상화는 끝내 갈 데를 찾지 못했고, 들라크루아가 사망한 후 누군가가 이 초상화를 둘로 쪼갰다. 작품을 하나로 파는 것보다 둘로 나눠 팔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쇼팽과 상드, 두 사람을 동시에 담은 특별한 작품이자 들라크루아의 걸작 중 하나인 쇼팽과 상드의 초상은 이렇게 어이없이 훼손되고 말았다. 현재 ‘쇼팽의 초상’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상드의 초상’은 덴마크 코펜하겐 오르드룹고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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