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9

2014.03.17

재벌가 집사가 몰래 녹음한 이유

프랑스 로레알 가문서 일한 본푸아 고령의 상속녀 지키기 화제

  • 백연주 파리 통신원 byj513@naver.com

    입력2014-03-17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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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가 집사가 몰래 녹음한 이유

    로레알 상속녀 릴리안(왼쪽)과 사진작가 바니에르의 한때 다정했던 모습.

    2008년 세계 최대 회장품 회사 로레알의 모녀 상속전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로레알의 상속녀인 릴리안의 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가 어머니 친구인 사진작가 프랑수아 마리 바니에르를 고소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프랑수아즈는 바니에르가 고령인 데다 치매 증세가 있는 어머니를 이용해 돈을 챙긴다고 주장했다. 릴리안이 창업자인 아버지로부터 27조 원대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딸이 단속에 나선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사진작가를 포함한 세 사람이 타협점을 찾으면서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최근‘바니에르-베탕쿠르 스캔들’이 다시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건 당시 녹음 내용을 증거로 제출하며 관심을 모았던 베탕쿠르 가문의 집사 파스칼 본푸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14년간 세계적인 재력가를 보좌한 이 집사의 사연이 흥미롭다.

    사진작가 바니에르의 행동

    대기업이 주최하는 각종 파티와 행사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20대 후반 본푸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부잣집에서 집사를 모집 중이니 면접을 보라는 것이었다. 서비스업에 애착이 많았던 본푸아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를 면접한 이는 로레알 전 간부이자 릴리안의 절친인 모니크였다. 본푸아의 당당한 풍채와 정직함이 마음에 든 모니크는 그에게 일할 집주소를 건넸다. 그가 도착한 곳이 바로 릴리안과 남편 앙드레 베탕쿠르가 사는 저택이었다.

    저택에는 집사 3명과 메이드 3명, 정원사, 경호원, 회계사, 미용사 등이 근무했다. 본푸아의 업무는 릴리안의 남편 앙드레를 돕는 일이었다. 앙드레는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수차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침착하고 깔끔한 인물이었다. 본푸아는 베탕쿠르 부부에 대해 “일에 관해서는 매우 까다롭지만 참 좋은 분들”이라며“저택 수영장과 테니스코트를 직원들에게도 개방했고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좋은 대우를 해줬다”고 말했다.



    릴리안의 친구 가운데 사진작가 바니에르는 눈에 띄는 한 명이었다. 바니에르는 방문이 잦아지면서 약속 없이 불쑥 찾아오는 날도 많았다. 릴리안은 그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바니에르가 만취해 소리를 지르고, 딸과 사위 방에 들어가 잠을 자거나 화단에서 볼일을 봐도 그냥 넘어갔다.

    앙드레는 아내 주변을 맴돌며 일상을 파괴하는 수상한 남자 바니에르를 눈에 거슬려 했다. 그의 무례함과 자유분방함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인간관계까지 간섭할 수는 없었다. 바니에르가 저택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당시의 상황을 본푸아는 이렇게 말한다.

    “릴리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앙드레뿐이었다. 하지만 로레알 주인은 릴리안이고 그의 지출을 간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7년 앙드레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바니에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프랑수아즈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바니에르의 저택 출입을 금지시키라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한다면 고소하겠다고 선포했다. 직원들 말에 따르면 모녀가 다투는 소리가 웅장한 저택에 울렸다고 한다.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저택에 발길을 끊었던 프랑수아즈는 한 달 후 바니에르를 고소한다.

    법원 “불법행위 증거 확보”

    재벌가 집사가 몰래 녹음한 이유

    릴리안의 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왼쪽)와 베탕쿠르 가문의 집사 파스칼 본푸아. 본푸아는 최근 몰래 녹음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기력이 급격히 떨어진 릴리안은 손님을 맞으러 매번 거실로 내려가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는 남편이 쓰던 서재를 응접실로 사용하기로 했다. 침실과 가까워 편리했다. 본푸아는 비록 집사였지만 혼자 남겨진 릴리안이 걱정스러웠다. 앙드레까지 세상을 뜬 상황에서 누가 언제 찾아와 그를 이용할지 모를 일이었다. 본푸아는 그런 불상사를 막으려고 2009년 5월 25일 직접 녹음기를 구매해 서재에 설치했다. 녹음기 설치는 분명한 도청 행위로 징역 1년형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본푸아는 릴리안을 지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본푸아는 녹음된 내용을 통해 릴리안이 얼마나 나약한 상태인지 알았다. 1922년생로레알 상속녀는 아흔 살을 바라보는 노인일 뿐이었다. 재정을 관리하는 파트리스 드 메스트르와의 대화를 통해 기억력도 정상이 아님을 알게 됐다. 릴리안은 자신이 바니에르에게 준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언제 결정된 일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일부는 아예 기억조차 못 했다. 바니에르가 그동안 후원금 등을 핑계로 릴리안으로부터 챙긴 돈은 8억2000만 유로가 넘었다. 게다가 베탕쿠르 가문의 전 재산을 상속한다며 횡설수설하는 내용까지 나왔다. 본푸아는 약 1년간 녹음을 통해 스위스 비밀계좌, 소유권을 부인했던 부동산 존재, 탈세, 선거자금 지원 등 그동안 몰랐던 비밀도 알게 됐다.

    베탕쿠르 가문의 비밀과 바니에르의 실체가 벗겨질수록 본푸아의 고민도 깊어갔다. 녹음 내용이 세상에 공개되면 바니에르뿐 아니라 릴리안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는 마침내 사직서를 제출하고 프랑수아즈를 찾아가 녹음 내용을 건넸다. 프랑수아즈는 이를 경찰에 증거로 제출했다.

    그 후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졌다. 녹음 내용 때문에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베탕쿠르로부터 정치 후원을 받았다는 ‘사르코지-베탕쿠르’사건 등이 터져나왔다. 릴리안은 외국 은행에 보관했던 모든 재산을 본국으로 들여왔으며, 바니에르와 인연을 끊고 딸과 화해했다. 도청 혐의로 조사받던 본푸아에게 경찰은 “녹음 내용을 이용해 바니에르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나”라고 물었다. 본푸아는 “바니에르를 협박해 돈을 받았더라도 어차피 그 돈은 릴리안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 확보를 목적으로 도청한 것을 감안해 본푸아를 석방했다.

    “나에게 바니에르-베탕쿠르 스캔들은 사건이 아니다. 돈을 노린 사람에게 파멸 위협을 받았던 한 가족의 이야기다. 베탕쿠르 부부는 은인 같은 분들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영웅도, 재판관도 아니다. 그저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재벌가 집사로 비밀과 스캔들로 가득했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한 본푸아는 현재 베탕쿠르 저택에서 근무했던 요리사와 함께 작은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매입한 이 호텔은 23개 객실을 갖췄는데 베탕쿠르 저택과 가까운 곳에 있다. 그에게 베탕쿠르 부부와 함께했던 시간은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는 “실내에 가득했던 꽃향기, 릴리안의 향수와 앙드레가 자주 피우던 시가 냄새, 식기들이 부딪히던 소리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아련하게 눈물이 맺힌다”고 말한다.

    올해 92세인 로레알 상속녀 릴리안은 2011년 10월 17일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민법의 성년후견제도에 의해 후견 보호인을 지정해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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