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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환절기 아랍 납치·테러 ‘몸살’

독재정권 무너진 자리에 ‘힘의 공백’…종교와 부족 얽혀 있어 민주화 난망

  • 유덕영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firedy@donga.com

환절기 아랍 납치·테러 ‘몸살’

2011년 10월 리비아에서 충격적인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 속 주인공은 42년간 리비아에서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무아마르 알 카다피. 그런데 영상에서 카다피는 반군에 둘러싸여 머리채를 잡힌 채 발길질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상태로 얻어맞고 있었다. 재판에 넘겨지기도 전 독재자는 끝내 시민들 손에 최후를 맞았다.

독재자가 사라진 지 2년여가 지난 리비아에서 우리나라에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1월 19일(현지시간) 수도 트리폴리에서 한석우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관장이 무장 괴한들에게 피랍된 것이다. 한 관장은 피랍 사흘 만에 무사히 구출됐지만 한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괴한들이 무장한 채 돌아다니고 외국인을 납치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상황이다.

한석우 관장 피랍과 구출 사건

독재자를 몰아낸 민주화시위인 ‘아랍의 봄’ 물결이 2011년 2월부터 리비아에도 거세게 몰아쳤다. 독재자 카다피만 사라지면 민주화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카다피가 몰락하고 3년이 지났지만 도심에서 외국인 납치가 자행될 만큼 현실이 불안하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트리폴리는 리비아 수도이자 최대 상업도시다. 아랍의 봄 시위 전만 해도 트리폴리는 카다피의 강력한 통제 아래 매우 안정된 도시였다.

범국민적 민주화시위는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와 동시에 혼란도 가져왔다. 카다피 사망 이후 과도정부는 리비아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카다피 정부군에 맞서 싸우던 단체들은 카다피 사망 이후에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절대 권력이 사라진 리비아에선 1700여 개 무장단체가 각자 자기 영역을 주장하며 난립하고 있다.



이 무장단체들은 카다피에 맞서 싸우던 반군이나 실업자 신세가 된 친(親)카다피 자경단원, 내전 기간에 풀려난 죄수가 주축이다. 또 일부 이슬람계 무장단체는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 전국 각지에서 자기 이권이나 권력을 위해 피를 흘린다. 동부 벵가지 등에선 과도정부와 별도로 자체적으로 총리를 뽑고 중앙은행을 운영하는 등 분리 길을 가고 있다. 유전이 풍부한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 세력은 일방적으로 자치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일부 민병대는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절대 권력자가 사라진 이후 각자 영역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이 전국에서 펼쳐진다.

환절기 아랍 납치·테러 ‘몸살’

최근 리비아 무장 괴한에게 납치됐다 풀려난 한석우 KOTRA 무역관장.

명목상으로는 22만5000여 명 병력이 국가 통제를 받는 민병대 소속으로 등록됐다. 하지만 지역 민병대 지휘관이나 그 조직과 연계된 정치지도자가 이 민병대를 실질적으로 움직인다. 경찰력이나 군사력이 약한 과도정부는 이들 민병대에게 일부 지역 치안을 위탁했다. 민병대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력을 휘둘러도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안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으면서 과격 이슬람주의 세력도 득세한다. 남서부 사막 지역에는 말리에서 프랑스군에게 쫓겨 온 알카에다 연계 단체가 피란처를 차렸다. 하지만 화력에서 밀리는 정부군은 이 단체들이 세를 불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 말고는 방법이 없다. 아랍권 최대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리비아를 ‘무장단체 천국’이라고 일컬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혼란은 불 보듯 빤하다. 외국인, 내국인을 가리지 않고 납치와 암살, 테러가 끊이지 않는다. 2012년 9월 11일 벵가지에 있는 미국영사관은 이슬람 무장단체로부터 공격받아 크리스토퍼 스티븐슨 대사를 비롯해 미국인 4명이 사망했다.

이집트·튀니지 혼돈의 땅

지난해 10월에는 알리 자이단 리비아 과도정부 총리가 무장단체에게 납치돼 억류되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해 11월에는 무장단체와 시위대가 충돌해 40여 명이 사망하면서 트리폴리에 48시간 동안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도 1월 18일 친카다피 무장단체가 남부 세바 인근 정부 공군기지를 점거하자 의회가 결국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납치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지난해에만 한국인을 상대로 한 무장강도가 10여 차례 벌어졌을 만큼 치안 상황이 좋지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카다피 지지자들이 트리폴리 서쪽 지역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계획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력과 벵가지에 근거를 둔 이슬람 세력의 대결 구도가 펼쳐지는 것도 혼란이 가중되는 이유다.

아랍의 봄 물결로 독재자를 몰아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다른 국가들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재정권이 사라진 자리에서 종파·부족 간 권력 싸움이 벌어지고, 테러 세력은 커가고 있다.

‘현대판 파라오’라 불리며 30년 동안 철권통치했던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집트도 혼란스럽고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쫓겨난 이듬해 치른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이집트 사상 처음으로 무함마드 무르시가 민선 대통령에 당선했다. 하지만 안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무르시 대통령의 정책이 국민 마음을 얻지 못하면서 반정부시위가 이어졌고, 지난해 7월 무르시 대통령도 집권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군부가 무르시 지지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1000명을 넘었다. 이후 무르시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자 이집트 내 최대 이슬람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이 ‘테러조직’으로 공식 분류되자 결사항전에 나섰다.

최근 이슬람 세력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고 군부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방향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개헌 국민투표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에도 카이로에서 무르시 지지 세력과 경찰이 충돌해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월 7일엔 이집트 노동부 소속 공무원과 관광협회 임원 등 정부당국자 4명이 시나이 반도 남부에서 무장 괴한에 납치됐다 8일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시나이 반도는 우리 정부가 여행경보 3단계(여행제한)를 발령했을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다. 현지 한국대사관은 리비아에서 한 관장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며 새벽이나 야간 등 위험 시간대에 이동하는 것을 피하라고 당부했다.

아랍의 봄 물결의 시발점인 튀니지에도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2010년 12월 노점상 청년의 분신자살로 촉발한 민주화시위로 23년간 집권해오던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이 이듬해 권좌에서 내려왔다. 시민 힘으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낸 첫 아랍 지역 시민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과 세속주의 세력 간 충돌이 이어졌고, 청년실업률은 30%에 육박했다. 물가는 오르고 삶의 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국민 불만이 쌓이면서 시위가 이어졌고, 폭력 사태로 변질되곤 했다.

최근엔 아랍의 봄 이후 가장 많은 국민이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다. 야당 지도자 초크리 벨라이드 암살 배후로 여당이 지목되면서 아랍의 봄 이후 최대 규모 시위가 잇따랐다. 시위 현장에선 2011년 이후 ‘정권 퇴진을 원한다’는 구호가 다시 등장했다.

시리아에선 2011년 3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시위로 촉발된 유혈사태가 3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정부군과 반군 간 내전이 3년간 이어지면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난민 수도 900만 명에 달한다.

외부 세력까지 편을 갈라 지원에 나서면서 해결책 마련이 쉽지 않다.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러시아 등은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고, 미국 등 서방은 반군 세력을 지원했다. 알카에다 연계 세력 등도 시리아 반군에 합류했다. 여기에 수니파와 시아파 간 대립 양상도 심화하면서 인근 수니파 아랍국과 시아파 이란도 시리아 사태에 개입했다. 이 와중에 지난해 8월 광범위한 화학무기 공격이 이뤄져 500~1400명이 숨지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시리아 평화회담(제네바2 회담)을 개최하는 등 시리아 내전을 끝내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기대 컸던 만큼 실망도 커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냈던 예멘에서도 안정 회복은 머나먼 과제다. 이슬람 무장 세력 등은 정부 요인을 암살하고, 군경을 겨냥한 테러를 계속 벌인다. 북부 지역에서 시아파와 수니파가 충돌하는 등 공권력이 자리 잡지 못해 불안이 계속 이어지면서 경제 회복에는 손쓸 여력조차 없다.

3년 전 아랍 지역을 휩쓴 아랍의 봄 물결은 민주화한 사회가 펼쳐질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권위주의 정부는 무너졌지만 카리스마 지도자가 떠난 자리를 메울 대안이 없어 ‘힘의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독재 타도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는 이뤘지만 종교와 부족으로 나뉘어 분쟁을 벌이면서 더 복잡한 문제가 해결을 기다린다.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할 특별한 이념이 부족하다는 것도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요소로 꼽힌다. 아랍은 아직 ‘환절기’다.



주간동아 2014.01.27 923호 (p58~60)

유덕영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fir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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