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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국수와 살다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한국인 오랫동안 밀가루 음식 귀한 대접…1900년대 이후 식당 메뉴로 올라 오늘날까지 발전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식탁 위의 한국사’ 저자 duruju@aks.ac.kr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사당 있는 집에서는 유두차례를 지냅니다. 밀, 보리를 천신(薦新)합니다. 보리수단, 밀국수 그릇은 사당이 귀한 오늘날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보리수단은 못 먹어도 탈이 없지만 밀국수는 안 먹으면 못씁니다. 이날 밀국수를 먹으면 더위 아니 먹는다고 예전부터 전하야 오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 사람이 어련히 알고 말하였을 것이 아니니 오늘 점심은 밀국수들을 해서 잡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본래는 햇밀가루라야 쓰는 것입니다만, 오늘날 세상이 세상이니 중국 밀가루로 대신하여도 더위가 미리 알아차리고 아니 덤빌 듯합니다.’

이 글은 1924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기사 제목은 ‘금일은 유월 유두일(流頭日)’이다. 알다시피 유두일은 음력으로 6월 15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날 보리와 밀을 천신한다고 했다. 천신은 제철 곡식이나 과일을 조상 위패를 모신 사당에 가장 먼저 올려 감사를 표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맘때쯤 보리와 밀을 수확한다는 말이 된다. 보리는 익히 알지만, 밀은 좀 생소하다. 사실 밀은 파종 시기를 기준으로 봄밀과 겨울밀로 나눈다. 봄밀은 가을, 겨울밀은 여름에 수확한다. 그러니 유두일에 갓 나온 햇밀은 겨울밀을 말한다. 보통 봄밀은 연간 평균기온이 3.8도면서 여름 평균기온이 14도 이상인 지역에서 재배해야 품질이 좋고 생산량도 많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한반도는 봄밀을 재배하는 데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조상 제사상 오르는 중요한 제물

1931년 발간한 ‘조선총독부 농업시험장 25주년 기념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재래종 겨울밀은 황해도, 평안남도, 강원도 그리고 경북 북부에서 일부 생산됐다. 품질에서나 생산량에서나 황해도 겨울밀이 으뜸이었다. 그 덕분에 조선시대부터 서울이나 개성 사람은 유두일이 되면 햇밀을 남부 지역 사람에 비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년 내내 유두일을 기다려 햇밀로 밀국수를 만들어 먹었으니, 당연히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도 밀의 귀중함에 보태졌다.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쌀쌀해진 날씨에 뜨거운 국수를 먹는 서울 남대문시장 상인들.

사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지배층은 밀가루 음식을 굉장히 귀한 음식으로 여겼다. 그 이유는 한나라 이후 중국인이 밀가루 음식을 즐겨 먹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주자(朱子·1130~1200)의 ‘가례(家禮)’를 통해 국수가 조상 제사상에 오르는 중요한 제물 가운데 하나임을 익히 알았다. 이 때문에 안동 선비들은 유두일 전후에 수확한 겨울밀을 잘 보관했다가 조상 기제사 때 메(신위 앞에 놓는 밥)와 함께 주발이나 사발에 국수를 돌돌 말아 상에 올렸다.

그런데 품질 좋은 봄밀을 구할 수 없으니 기회만 되면 중국에 가서 밀을 구해오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들고 와야 했기에 그 양이 극히 적었다.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청나라 군사가 대거 한양에 들어왔고, 그 후 한반도에 중국인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화북 출신이던 그들은 기선으로 중국 봄밀을 한반도로 실어 날랐다. 그 덕분에 위 기사에서도 나와 있듯이 중국산 밀가루로 유두일에 밀국수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심지어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밀을 수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밀이 증가하자 1910년대 이후 국수는 떡국, 설렁탕, 냉면과 함께 가장 흔한 음식점 메뉴로 자리 잡았다. 당시 사람들은 국수 판매점을 그냥 국숫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국숫집도 약간 전문성을 보였다. 국수장국처럼 조선식 국수를 판매하는 국숫집도 있었지만, 이미 전문화한 냉면집도, 심지어 중국인이 운영하는 청요릿집도 국숫집이라고 불렀다. 국숫집은 한자로 ‘면옥(麵屋)’이라 적었다. 간판에는 면옥이라고 적고 냉면이나 만두 혹은 국수장국을 판매했다.

북한 지역은 밀과 메밀 풍부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던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남한지역을 여행한 뒤 1918년 발표한 ‘남유잡감(南遊雜感)’(‘청춘’ 4호)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은 감상을 적었다.

‘충청도 이남으로 가면 술에는 막걸리가 많고 소주가 적으며 국수라 하면 밀국수를 의미하고, 서북에서 보는 메밀국수는 전무하다. 서북지방에는 술이라면 소주요, 국수라면 메밀국수인 것과 비겨보면 미상불(未嘗不) 재미있는 일이다. 아마 막걸리와 밀국수는 삼국 적부터 있는 순수한 조선 음식이요, 소주와 메밀국수는 비교적 근대에 들어온 지나식(支那式·중국식) 음식인 듯하다. 길을 가다 주막에 들어앉아서 냉수에 채어 놓은 막걸리와 칼로 썬 밀국수를 먹을 때는 천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더라.’

그렇다. 1910년대만 해도 북한 지역에서는 메밀국수를 국수 가운데 으뜸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선시대부터 줄곧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동경하던 남한 지역 양반들은 그것을 쉽게 구하게 되자 밀국수에 흠뻑 빠졌다.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그것을 칼로 썬 칼국수였다. 이것을 뜨거운 물에 넣고 끓인 다음 긴 젓가락으로 건져 장국에 말아내기 때문에 ‘건진국수’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광수가 말한 삼국시대 운운은 옳은 말이 아니다.

남한 지역에 비해 밀과 메밀이 훨씬 풍부하던 북한 지역에서는 밀가루를 이용해 주로 만두나 편수를 만들었고, 메밀가루로 국수를 뽑았다. 지금은 여름 음식이 된 냉면이 바로 이광수가 말한 메밀국수다.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 냉면이 서울로 내려왔다. 특히 겨울철 한강에서 꽁꽁 언 얼음을 깨 전기로 냉동하는 기술이 도입된 1920년대 평양냉면은 서울에서 가장 인기를 끈 국수가 됐다. 평양에서 이주한 주방장이 냉면기계에서 뽑아낸 메밀국수는 동치미 국물에 ‘아지노모도’(일본에서 들어온 화학조미료)까지 들어가 입으로 줄줄 당기는 국수의 묘미와 국물의 달콤함, 그리고 그 속에 뜬 얼음으로 한여름 식객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 지역 출신 사람이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메밀국수와 구분하려고 ‘밀국수’라고 불렀다. 위에서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가 그렇고, 이광수의 언급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요리학 전문가였던 이용기(李用基·1870~1933?)는 1924년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 특별히 밀국수를 언급했다.

‘양밀가루를 물에 반죽할 때 장을 조금 쳐서 주무르고 여러 번 친 후 방망이로 얇게 밀어서 잘게 썰어 밀가루를 뿌려 한데 붙지 않게 한 후에 끓는 물에 삶아내어 물을 다 빼어버리고 그릇에 담은 후 맑은 장국을 끓여 붓고 국수장국에 고명을 얹나니라.’

이용기는 같은 책에서 국수장국에 대해 ‘우리나라 국수는 행습이 되어 그러하나 타국서 만드니만 못 한 것은 기계에다가 갈아 만들지 않고 배에다가 갈아 만드는 고로, 가는 돌가루가 있기로 자금자금 하야 그것이 좋지 아니할뿐더러 메밀에 섞인 돌을 일지도 않고 그냥 갈아 만드나니 이것이 큰 험절이니라’고 적었다. 그러니 이용기가 말한 국수장국은 결코 밀국수가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였다.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경기 안양시 국수전문점 ‘잔치하는 날’에서 국수를 받아들고 있는 손님들.

기계로 갈아 곱고 맛도 좋은 밀국수는 해방 이후 잠시 수입량이 줄어 먹기 어려웠지만, 6·25전쟁을 겪으며 미국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준 밀과 밀가루 덕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칼국수는 물론, 수제비가 부족한 쌀밥을 채워주는 양식이 됐다. 여기에 국수를 기계로 뽑아 말린 마른국수가 집집마다 보릿고개를 넘기는 식량이었다. 마른국수는 메밀국수가 들어갔던 국수장국을 대신해 잔치국수가 됐다. 여기에 일본인이 남기고 간 말린 멸치는 국수장국에 넣던 값비싼 쇠고기 자리를 대신했다.

심지어 월남해 부산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메밀을 구하기 어렵자 ‘밀면’이란 음식을 만들어 새로운 국수 세상을 열었다. 제주 사람은 잔치 때 잡은 돼지로 국을 끓인 뒤 마른국수를 말아서 내는 ‘고기국수’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 이후 화교가 운영하던 중국음식점들에서 만들어낸 짜장면, 우동, 짬뽕은 ‘수타면’이라는 중국식 국수를 한국 음식으로 진화하게 했다.

국수를 먹으며 김치 찾는 한국인

면발처럼 길고~긴  국수 사랑

강원도 태백 문곡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들판에 만개한 메밀꽃.

여기에 동네마다 마른국수를 생산하는 가내공장이 있어 햇볕 좋은 날 뽀얀 국수를 말리는 장면은 사람들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식품산업의 성장은 국수의 인스턴트화를 가져왔다. 1963년 인스턴트 라면, 69년 인스턴트 칼국수가 상품으로 출시됐다. 특히 제3공화국이 줄기차게 추진한 혼·분식 장려운동은 국수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 콩국수가 유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스파게티가 이탈리아 음식점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하다, 80년대 미국 패스트푸드점을 따라 널리 퍼지면서 또 다른 인기 국수가 됐다. 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가 이뤄진 이후 미국식 베트남 쌀국수까지 한국인의 국수 열기에 들어갔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일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젊은이가 증가하면서 일본 ‘라멘’ 역시 한국인이 즐겨 먹는 국수 대열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수는 한국인에게 온전히 독립된 끼니 구실을 하지는 못한다. 인스턴트 라면을 먹든, 잔치국수를 먹든 김치를 곁들이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이 한국인이다. 쌀밥은 반찬과 함께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낟알 음식이다. 이에 비해 밀가루는 반죽 단계에서 간이 되고, 국물이나 양념에도 채소, 고기 따위가 들어간다. 국수를 먹을 때 별도로 반찬을 찾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인은 여전히 국수를 먹으면서도 김치를 찾는다. 심지어 남은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는다. 한국인은 쌀밥을 먹듯이 국수를 먹고, 국을 먹듯이 국수를 먹는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이 국수를 먹는 방법이다.



주간동아 918호 (p38~40)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식탁 위의 한국사’ 저자 duruju@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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