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7

2013.10.07

리틀맘 ‘주홍글씨’ 아닌 미래 설계

미혼모 교육 나래대안학교 ‘육아와 학업’ 통한 건강한 사회구성원 만들기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3-10-07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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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맘 ‘주홍글씨’ 아닌 미래 설계

    미혼모를 위한 위탁 교육시설 나래대안학교에서 ‘어린 엄마’들이 사회 수업을 받고 있다.

    “오늘 단백질부터 배울 차례지? 자, 첫 줄 읽어보자. ‘단백질은 효소, 호르몬, 항체의 주성분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네. 이런 단백질은 어디에 많이 들어 있을까? 고기, 치즈, 우유? 그래, 맞아. 그러니 아이에게 이런 음식을 충분히 먹여야겠지? 그래야 세포, 근육, 머리카락까지 튼튼해져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나래대안학교의 과학수업은 독특했다. 이시은(41) 교사가 학생 두 명 앞에서 ‘단백질’에 대해 열강하는 동안, 끊임없이 ‘아이’가 예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임신으로 학업 중단 위기 돕는 여러 장치

    “여기 보자. 단백질은 섭씨 40도가 넘으면 변형된다고 쓰여 있네. 그럼 단백질로 이뤄진 사람 몸은 어떻겠어? 체온이 40도가 넘으면 DNA가 변질돼 죽을 수도 있겠지? 사람 치사 온도는 보통 42도라고 해. 아이는 열에 더 약하지. 아이가 열이 나면 무조건 옷을 벗기고 체온부터 내려야 하는 거야. 단백질 변형 온도가 몇 도? 40도!”

    단발머리에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나영이(가명)는 연신 고개를 끄떡이다 “선생님, 근데 전 임신한 뒤부터 고기가 싫고 흰 우유만 좋아요. 왜 그럴까요?” 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직 아이 티가 가시지 않은 말간 얼굴 아래로 볼록 솟아오른 배가 보였다. 그와 나란히 앉아 교과서를 넘기는 은지(가명) 역시 헐렁한 면 티셔츠 아래 임부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래대안학교는 나영이와 은지 같은 미혼모를 위한 학교. 2010년 서울시교육청이 대안교육 위탁기관으로 지정한 곳으로, 정규 학력이 인정되는 게 특징이다. 재학 중 임신해 일반적인 학교생활을 하기 어렵게 된 청소년은 이곳에서 같은 처지 친구들과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등 일반 교과를 배운다. 수업은 해당 과목 교사자격증을 가진 교사가 진행한다. 출산 후엔 이곳에서의 학업을 인정받아 본래 학교 해당 학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이 양육 때문에 일반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울 경우 재위탁을 통해 이곳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도 한다.

    정규 학력이 인정되는 만큼 학사관리는 꼼꼼하다. 일반 학교와 똑같이 수행평가, 중간·기말고사가 있고, 내신 등급도 매긴다. 교실 벽에는 지각, 결석, 수업 중 이탈 등의 경우 각각 10점씩 벌점을 준다는 공지문이 붙어 있다. 단 ‘탁아선생님이 늦게 오실 경우,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경우, 아이가 아픈 경우’엔 예외다.

    강영실(53) 나래대안학교 교무는 “이 학교의 모체는 임신 혹은 산후조리 중인 미혼모와 아이를 보호하는 시설 ‘애란원’”이라며 “학생들은 애란원 생활관에 머물면서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임신 중에는 건강상의 문제에 대해 배려를 받고, 출산 뒤에는 아이를 탁아선생님께 맡긴 뒤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신으로 학업 중단 위기에 놓인 청소년 미혼모를 돕는 여러 장치를 갖춘 셈이다.

    리틀맘 ‘주홍글씨’ 아닌 미래 설계
    이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원래 학교 학적이 유지되는 것 또한 나래대안학교의 특징. 학생들은 이곳에서 졸업해도 원래 다니던 학교 이름으로 된 졸업장을 받는다. 미혼모를 위한 대안학교에 다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2012년 입소생 중 3명이 이 시스템을 통해 고교 졸업 학력을 취득했고, 2명은 대학에 진학했다. 현재는 중학생 4명, 고교생 8명이 기존 학적을 유지한 채 수업을 듣고 있다. 강 교무는 “더 많은 미혼모가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고 했다.

    8월 말 통계청은 지난해 우리나라의 혼외 출생자가 1만144명이라고 발표했다. 전체 출생아 100명 중 2.11명꼴로, 해당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81년 이후 가장 많다. 97년 4196명이던 혼외 출생자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이들 중 어느 정도가 청소년 미혼모의 자녀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전문가들은 대략 절반 정도로 추정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임신과 동시에 정규 교육에서 배제당한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가 대구가톨릭대 제석봉 교수팀에 의뢰해 진행한 ‘학생 미혼모 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조사대상자 중 84.9%가 학업 중단 상태였다. 임신 사실이 주위에 알려질까 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거나, 학교의 징계 혹은 강요에 의해 자퇴한 것.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0.1%는 교육 욕구가 ‘매우 강하다’고 답했고, ‘강하다’(28.8%)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가정과 학교에서 외면당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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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실 나래대안학교 교무.

    국가인권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청소년 미혼모의 교육권 보장 실태조사’ 보고서에서도 설문에 응한 청소년 미혼모 63명 중 87.6%가 학업 지속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2010년 서울시교육청이 나래대안학교를 위탁 지정하는 등 시도교육청별로 미혼모를 위한 교육기관을 열고 있지만, 이곳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 수는 턱없이 적다. 2011년 박영아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교육청 위탁 대안학교에서 학업을 지속한 미혼모는 61명에 불과했다.

    강 교무는 “미혼모가 학력 인정 대안학교에 입학하려면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 생활기록부와 학교장 추천서 등을 받아야 한다. 미혼모의 경우 대부분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가정과 학교에서 외면당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해와 배려를 받는 게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학업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또 “청소년 미혼모 중에는 임신 사실이 드러나기 전 자신이 사는 지역을 떠나려는 아이들도 있다. 출산과 입양 후 학교로 돌아가길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시도교육청별로 위탁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에 학력을 인정받으려면 해당 지역에 머물러야 한다. 이에 부담을 느끼고 아예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있다”고 덧붙였다.

    강 교무에 따르면 나래대안학교에도 다른 시도 지역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이 입학을 문의하는 사례가 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수업을 듣는 건 가능하지만 학력은 인정받지 못한다”고 안내해준다고 한다. “더 많은 학생이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전국 단위로 위탁형 대안학교를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강 교무의 바람이다. 그는 “미혼모가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면 이후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어려워 항구적인 빈곤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또 사회적으로 소외되면서 재임신 등 또 다른 위기 상황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교육부도 ‘학습권 보장’ 안내문 발송

    리틀맘 ‘주홍글씨’ 아닌 미래 설계

    5월 나래대안학교 학생들이 자녀와 함께 서울 어린이대공원 에서 봄소풍을 즐기고 있다.

    그래서 나래대안학교의 운영 목표는 학생의 학업 중단 및 재임신 예방, 학교 적응력 향상 교육을 통한 재적학교 복귀다. 학생의 소질과 적성을 찾아주고, 자립 능력을 길러주려고 컴퓨터, 미용 등 직업교육도 한다.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거나 독립공원 등 역사 현장을 탐방하는 체험학습도 진행한다.

    2010년 나래대안학교 개교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시은 교사는 “우리 아이들은 평소 남의 눈총 때문에 집 앞 슈퍼마켓조차 자유롭게 다니지 못한다. 그러던 학생들이 체험학습 때 담당 교사,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걸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며 “미혼 임신이 장려할 일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한 이들을 격려해주고, 나아가 자녀와 함께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실제로 나영이와 은지, 그리고 점심시간 식당에서 마주한 수많은 어린 미혼모는 품 안에 자신보다 더 어린 아이를 안고 있을 뿐, 잘 웃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평범한 청소년과 다르지 않았다.

    나래대안학교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대학에 진학한 김모(20) 씨는 ‘애란원’ 소식지에 쓴 글을 통해 “우리가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손가락질받을 일을 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우리도 학생으로 배울 권리는 갖고 있다”며 “10대 리틀맘에게 공부할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대입 준비 시절을 돌아보며 “9시 30분부터 수업을 시작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는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많은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힘이 났다. 나래대안학교가 없었다면 수능을 치르는 건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래대안학교는 수시로 이런 선배들을 초청해 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는 방법 등에 대한 조언을 듣도록 하고 있다.

    교육부는 6월 시도교육청에 ‘임신·출산, 이성교제 등을 이유로 퇴학, 전학, 자퇴 권고 등 과도한 학습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이미 학업을 중단한 미혼모에게는 재입학 절차 및 위탁교육 등 학습권 보장 방안을 알려주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보냈다. 나래대안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더 많은 ‘어린 엄마’들이 ‘배울 권리’를 누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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