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4

2013.09.09

조선 명필 이삼만 종이 작품은 단 3점뿐

위조하고 베끼고 여전히 활개…그가 남긴 비문 최고 필력 증명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9-09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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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명필 이삼만 종이 작품은 단 3점뿐

    1 이삼만이 1823년에 쓴 ‘이우정 묘비’ 탑본. 2 이삼만이 1826년에 쓴 ‘동래정씨 열녀비’ 탑본. 3 이삼만이 1827년에 쓴 ‘임상록 묘비’ 뒷면 탑본. 4 이삼만이 1832년에 쓴 ‘최성전 효자비’ 탑본.

    1980년 붓글씨에 미쳤던 전주고교 1학년 학생은 과외금지조치에도 서울까지 올라가 일중 김충현(1921~2006) 선생에게 붓글씨를 배웠다. 붓글씨를 알면서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7)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연히 그는 서예교본에 실린 이삼만의 글씨를 발견하고 혼자 열심히 따라 썼다. 20여 년이 지난 뒤, 그 글씨를 다시 찾아본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 글씨는 가짜였다.

    부끄럽지만 이 글은 필자 얘기다. 이 일이 있은 뒤 필자는 이삼만의 글씨가 세상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삼만은 ‘전주이씨족보’에 따르면 1770년 음력 9월 28일 태어나 1847년 음력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그의 진짜 글씨로, 그가 썼다는 비석 글씨 탑본부터 찾았다. 비록 비석 글씨에 석공 솜씨가 가미됐지만, 여전히 그의 글씨 진면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삼만이 남긴 비문 글씨를 연대순으로 대략 살펴보면, 1797년 ‘이우계 묘비’ 앞뒷면, 1823년 ‘이우정 묘비’ 앞뒷면(그림1), 1826년 ‘동래정씨 열녀비’ 앞뒷면(그림2), 1827년 ‘임상록 묘비’ 뒷면(그림3), 1832년 ‘최성전 효자비’(그림4), 1833년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 뒷면, 1835년 ‘김양성 묘비’ 뒷면, 1838년 ‘최성철 효자비’, 1841년 ‘최성철 묘비’ 뒷면, 1846년 ‘남고진 사적비’(그림5) 등이 있다.

    오직 근육과 뼈로 쓴 것

    이삼만 글씨는 이들 묘비에 새겨진 것처럼 명필임에 틀림없다. 그도 자신의 서체를 만든 서예가로서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의 비문 글씨는 필획 하나하나가 분명하고 무겁고 힘차다. 그의 말처럼 그의 글씨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오직 근육과 뼈로 생기 있게 쓴”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씨 짜임새에서 필획이 모아지지 않고 떨어진 겉모습만 보고 글씨 흐름이 단절된 것처럼 오해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그가 말하길 “뛰어난 운치란 글씨 근육과 기맥이 서로 어울려 기운이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마치 학이 하늘에 노닐며 쉬지 않는 것과 같다. 글씨 쓰는 사람이 서법을 말하되 필력을 얻지 못하면 처음부터 이야기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삼만의 비문 글씨와 그의 서예이론은 하나다. 그의 글씨와 말은 정직해 따로따로가 아니다. 필자는 국공립박물관과 전시장 및 미술시장에서 수없이 많은 이삼만의 글씨 작품을 봤다. 하지만 필자가 2002년부터 오늘까지 찾아낸 이삼만이 종이에 쓴 서예작품은 ‘게송 잔권’(그림6), ‘유수체 시고’(그림7), 1842년 음력 12월 16일 ‘서찰’(그림8) 3점에 불과하다. 이삼만의 비문 글씨와 이 세 작품을 보면, 그의 필력과 기운이 강철처럼 강하면서 물결처럼 부드러워 가히 최고의 예술경지라 할 수 있다.

    필자가 봤던 수많은 이삼만의 가짜를 정리하면, 크게 위조자가 ‘그의 서예작품을 베낀 필사본’을 그의 글씨로 위조한 것과 처음부터 졸렬하게 위조한 가짜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그 수준이 너무 낮아 정말 쓰레기에 불과하다. 필자가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전북 익산시에 살던 조모 씨가 가짜 서화작품을 수없이 만들면서 이삼만의 가짜도 많이 만들었다. 조씨가 죽은 뒤 유명 화랑에서 가짜 서화작품을 전부 쓸어갔음에도 그의 집 다락 등에서 여전히 많은 양의 가짜가 나와 전주에서 유통됐다.

    유독 이삼만의 글씨만 가짜가 많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하 신위(1769~1845)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살던 때는 ‘족자 두 개를 한 짝’으로 한 대련 형식의 서예작품이 크게 유행했다. 하지만 필자가 지금까지 찾은 신위나 김정희의 대련 작품은 각각 1점으로, 신위의 ‘소무적운’(그림9)과 김정희의 ‘무쌍채필’(그림10)뿐이다. 특히 신위나 김정희가 썼다는 병풍 글씨는 모두 가짜다. 이는 필자가 본 게 없어서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 진짜 작품이 많이 나타나 우리를 기쁘게 해주길 바란다.

    어느덧 ‘예술과 천기누설’ 마지막 회를 쓰게 됐다. 세어 보니 벌써 36회다. 무엇보다 부족한 필자의 글을 읽어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필자는 매회 글을 쓸 때마다 글재주가 없어 고민이 많았다. 필자가 못나서 미술품 감정학을 잘 소개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았다. 특히 미술품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품 진위를 결정하는 데 필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다. 작품 진위는 본래부터 작품에 있었고, 필자는 이를 알린 것에 불과하다.

    조선 명필 이삼만 종이 작품은 단 3점뿐

    5 이삼만이 1846년에 쓴 ‘남고진 사적비’ 탑본. 6 이삼만의 ‘게송 잔권’. 7 이삼만의 ‘유수체 시고’.

    국공립박물관 소장품부터 진위 가려야

    최근 중국 미술시장이 커지고 미술품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올해 봄 경매에서 베이징의 모 경매회사는 총 거래액이 28억3000만 위안(5100억 원)을 넘겼다. 박물관 소장품조차 가짜가 90%에 달하는 중국에서 미술시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이유는 뭘까. 이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양런카이(楊仁愷·1915~2008) 선생이 참여한 중국고대서화감정소조(中國古代書畵鑑定小組)는 1983년부터 90년까지 8년 동안 중국 전역을 순회하며 6만1596개 고서화 작품을 감정했고, 진짜 작품 2만117개를 선별해 ‘중국고대서화도목(中國古代書畵圖目)’ 23권으로 출판했다. 이러한 빛나는 업적은 후학에게 무궁무진한 연구 자료를 제공했고 감정학 발전에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우리 미술시장의 안정과 번영을 바란다면, 먼저 국공립박물관과 미술관의 소장품부터 진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진짜를 찾고 보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누구나 진짜를 원하며, 돈은 불확실성을 참지 못한다.

    조선 명필 이삼만 종이 작품은 단 3점뿐

    8 이삼만의 1842년 음력 12월 16일 ‘서찰’. 9 신위의 ‘소무적운’. 10 김정희의 ‘무쌍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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