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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정전 60주년 국군포로 현주소 04

“네모골 살던 국군포로 그 자식들은 ‘43호’로 불렸다”

국군포로 돕기 팔 걷은 새터민 이혜경 박사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네모골 살던 국군포로 그 자식들은 ‘43호’로 불렸다”

“네모골 살던 국군포로 그 자식들은 ‘43호’로 불렸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가족이 기댈 수 있는 기관이 생겼다. 국군포로 국내 송환 운동을 펼쳐온 ㈔물망초(이사장 박선영·전 국회의원)가 5월 13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국군포로신고센터(신고센터)를 개소한 것이다. 신고센터는 국군포로 가족 등의 신고를 받아 자체 확인 작업을 거쳐 국군포로 명단 작성과 생사 여부 확인을 해나갈 예정이다. 물론 국무총리 산하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회)에서 납북자 신고를 받고 있긴 하다. 하지만 위원회에서는 신고 대상을 국군포로를 제외한 민간인 납북자로 제한하기 때문에 사실상 국군포로 신고를 받아주는 기관은 그동안 어디에도 없었다.

탄광지역서 25년간 지켜봐

개소식에서 만난 새터민 이혜경(48) 박사는 국군포로 출신 할아버지들에게 시루떡을 나르고, 국군포로 아버지를 찾아달라며 눈물짓는 딸의 얘기를 듣느라 분주해 보였다. 물망초인권연구소 간사인 그는 신고센터의 유일한 새터민. 그가 국군포로 문제에 적극 관여하는 이유는 뭘까. 인터뷰를 망설이는 그에게 “국군포로 실상을 알리는 차원이니 응해달라”고 청하자 함경도 말투로 나지막이 답했다.

“내가 살던 함경북도 새별군에는 국군포로가 많이 살았다. 포로들은 하면탄광, 상하탄광 같은 지역에서 일했는데 폐가 나빠져 진폐증, 규폐증(폐에 구멍이 나는 병)에 시달렸다. 그 지역에 13세 때부터 38세까지 살았으니 25년 동안 지켜본 셈이다. 내가 탈북한 2002년만 해도 포로 10여 명이 살아 있었다.”

이 박사가 그곳에 간 것은 어머니가 숙청됐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성신여고를 다니다 “북한에 가면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월북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엘리트 여성. 하지만 친척의 잘못이 드러나는 바람에 모녀는 새별군으로 추방됐다.



“그 지역에는 토착민 20%, 국군포로 20%, 나머지는 평양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살았다. 1974년부터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성분불량인은 물론 그 가족까지 숙청했다. 이름 하여 ‘평양시 주민정리사업’이다. 추방 대상은 성분불량가족뿐 아니라 생활불량자(조폭)와 장애인들이었다. 이 사업은 200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진행됐다.”

이 박사는 그곳에서 국군포로를 봤다. 그가 처음 만난 것은 국군포로가 아닌 국군포로 가족. 학급 인원 23명 가운데 4~5명은 국군포로 자식이었다. 그러면서 차츰 ‘국군포로는 남북 포로교환을 진행한 뒤 북에 남은 자로, 광업 같은 기피업종에 종사한다’ ‘북한 정부로부터 정착지원금을 받아 결혼한 후 보통 자식을 4~5명 낳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군포로들은 네모골(네모마을)에서 살았다. 그곳은 우리도 쉽게 출입할 수 없었다. 네모난 구멍이 뚫린 네모꼴 건물에 집이 여러 채 있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교도소처럼 사방에서 감시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곳에 산다는 이유로 포로 자식들을 따돌리지는 않았다. 간혹 분란을 조장하는 아이들은 있었다. 학교에서 부모가 조선노동당 당원인지, 비당원지를 물을 때가 있는데, 국군포로 자식들이 뭣 모르고 비당원이 더 높다고 으스댔다. 그럴 때면 몇몇 아이가 ‘높긴 뭐가 높아. 너희는 43호야’라며 깔봤다.”

이 박사도 처음에는 43호라는 말이 생소했다. 하지만 그 지역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그들을 점차 국군포로, 국군포로 자식이 아닌 43호라고 불렀다. 1956년 ‘내각결정 43호’에 따라 국군포로에게 공민증을 내주고 사회인으로 환원시켰는데 그후 사람들이 국군포로를 ‘43호’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군포로가 받은 차별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 80대, 시간 별로 없어

“네모골 살던 국군포로 그 자식들은 ‘43호’로 불렸다”

최근 ㈔물망초에서 “북한 탄광지역에 국군포로 113명이 생존해 있다”며 제출한 서류.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국군포로 자식들은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군포로 자식들은 군대도 갈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성분 좋은 사람만 군대에 가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못 가는 것이었다. 대학도 갈 수 없었다. 국군포로 자식들은 공부해봤자 좋은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공부에 흥미를 두지 않았다. 나도 성분이 좋지 않아 대학 가는 데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국군포로 자식들은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붕괴사고가 많은 탄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포로, 국군포로 아내, 국군포로 자식의 운명은 한 가지였다. 실제로 북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은 국군포로 가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도쯤 붕괴사고가 있었다. 국군포로 2명이 2~3일 동안 굴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책임비서가 설탕 1kg을 가져와서 구조된 포로에게 설탕물을 줬더니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얘기는 당시 탄광 일을 했던 어머니에게서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상황이 어려우면 그랬을까 싶어 안타까웠다. 어머니는 탄광에서 5년 동안 일했고 1980년대 후반 의사로 복직했다.”

이 박사는 한동안 그들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었다. 탈북 전 함흥약학대 약학부를 졸업한 뒤 병원에서 12년 동안 약사로 근무하느라 사회문제에 눈길을 돌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국군포로를 포함한 납북자 문제에 관심이 갔다. 탈북 후 삼육대 약대를 졸업한 뒤 약사고시를 바로 보지 않고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그래서다. 고시를 봐서 약사가 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고 싶었다.

“북한에 먹을거리가 없어 생사를 오가며 살다가 남한에 왔다. 그러다 보니 먹고사는 게 전부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나이에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14, 19세 두 딸 모두 수거함에서 주운 옷 입혀가며 키웠다. 어머니, 나, 두 딸 모두 신발 문수가 같아서 신발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넉넉하게 키우지는 못했지만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도 잘 따라오리라 본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북한의 보건일꾼 양성정책에 대한 연구’. 북에 납치된 서울대 의대 교수 16명 이상이 평양의대의 모체를 세우고 숙청됐다는 내용이다. 그는 평양의대에 다닌 새터민의 증언과 북한 자료를 바탕으로 1955~60년 평양의대 교원 29명 명단을 확보하고, 그중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 20명이 사상문제 등을 이유로 숙청, 처형, 좌천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앞으로 국군포로와 관련한 일을 얼마나 할지 모르겠다. 당장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친 만큼 행동해야 한다고 본다. 국군포로는 인권문제 아닌가. 포로 대부분이 80대다. 웬만한 분은 거의 다 돌아가셨다. 지금이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이 일은 영영 묻힌다. 오늘만 해도 국군포로 가족 6명이 신고하고 갔다. 딸이 와서 눈물 쏟는 모습을 보니 내 일의 귀중함을 알겠더라. 이제는 시간 전쟁이다.”



주간동아 889호 (p26~27)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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