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1

2013.04.01

우린 ‘파친코’ 하러 대마도 간다

도박 중독 한국인들 ‘일본 원정’…한글 간판까지 등장 한국인 유혹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3-04-01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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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파친코’ 하러 대마도 간다

    도쿄 시부야의 한 파친코점.

    “처음엔 일본여행 간 김에 경험 삼아 한 번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죠. 그런데 첫날에 단돈 1000엔이 순식간에 2만6000엔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고 나니 손을 뗄 수 없었어요. 결국 3박4일 여행 기간 내내 파친코에 빠져 지냈어요. 얼마나 땄냐고요? 여행경비와 현지에서 현금서비스를 받은 돈 30만 엔을 몽땅 털렸습니다.”

    한때 파친코에 중독된 적이 있다는 김모(42) 씨의 얘기다. 김씨는 “첫날에 대박을 낸 것이 문제였다”며 “그 후론 줄곧 잃기만 했는데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해 계속 파친코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대박 꿈을 좇아 약 2년에 걸쳐 1~3주에 한 번씩 주말마다 일본을 찾았지만 남은 건 사채 1억 원뿐이었다.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어느새 중독

    김씨처럼 일본 파친코에 빠져드는 한국인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대도시 파친코점에선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손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파친코점에서 만날 수 있는 대다수 한국인은 여행 온 김에 파친코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파친코에 대한 인식도 도박이라기보다 게임의 일종으로 가볍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 광고기획사 AD인 이모 씨도 ‘일본에서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라고 파친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학 시절부터 1년에 1~2회 이상 도쿄를 찾는 이른바 ‘일본통’인 그는 “도쿄에 갈 때마다 1만 엔 이상은 쓰지 않는다는 상한선을 정해놓고 파친코를 즐긴다”며 “돈을 따면 기분이 좋고, 잃어도 큰 손해는 보지 않으니 부담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씨처럼 가볍게 즐기지 못하고 파친코에 깊이 빠져드는 이들이다.

    “파친코에 빠져 주말마다 일본을 찾는다. 2년 동안 여권을 두 번 갱신했을 정도로 자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입국 확인 도장’ 한 방에 20만~30만 엔씩 깨진 셈이다.”

    조모(47) 씨는 스스로를 ‘심각한 파친코 중독’이라고 부를 정도로 파친코에 푹 빠진 사람이다. 평소에도 고스톱을 즐기는 등 도박에 관심이 많던 그는 파친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본을 찾았다고 했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로부터 파친코를 하고 온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초기엔 겸사겸사 일본 관광도 해볼까 하는 생각에 도쿄, 오사카로 갔지만 요즘엔 주로 후쿠오카나 대마도로 간다”고 털어놨다.

    조씨가 후쿠오카나 대마도를 선호하는 이유는 항공료와 체류비가 저렴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이동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후쿠오카까지 항공편을 이용할 경우 서울에서 70분, 부산에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부산에서 출항하는 고속선을 이용하면 후쿠오카는 2시간 30분, 대마도는 2시간 1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다 보니 후쿠오카와 대마도 파친코점에선 한국인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정도다. 한글 간판이나 안내문은 기본이고, 초보자를 위해 한국어로 된 파친코 안내서를 비치해둔 곳도 있다. 종업원들이 ‘연짱’(계속 터진다는 뜻) 등 간단한 한국어로 손님을 끌기도 하고,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고용해 편의를 도모하는 곳도 있다.

    조씨는 “후쿠오카에는 나 같은 한국인 중독자가 많고 한국말도 어느 정도 통해 다른 지역 파친코점에 비해 안심할 수 있다”며 후쿠오카와 대마도 파친코점의 장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조씨가 안심할 수 있는 이들 지역의 특화된 서비스는 한국인 파친코 중독자를 겨냥한 업체들의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씨와 마찬가지로 “매주 후쿠오카로 파친코를 하러 간다”는 이모(45) 씨는 “파친코로 대박을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80~90%는 판돈을 모두 잃는다”고 파친코의 낮은 승률에 대해 설명했다.

    “파친코는 자주 가고 오래 머물수록 잃는 돈이 많아지는 구조인데, 후쿠오카 파친코점들은 한국인이 부담 없이 편안하게 게임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해 나 같은 단골이 많다. 나야 이미 파친코에 빠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다니지만, 가끔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그들의 장삿속에 화가 날 때도 있다.”

    직장과 가정 잃은 사람 속출

    우린 ‘파친코’ 하러 대마도 간다

    대마도 파친코점에 걸린 한글 안내판.

    일본 파친코점이 한국인을 타깃으로 삼는 이유는 파친코 업계의 오랜 불황에 있다. 일본의 (재)사회경제산업성본부가 발행한 ‘레저백서’를 보면 일본 내 파친코 이용자 수는 1995년 2900만 명에서 2010년 167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용자 감소에 따라 시장 규모도 축소됐는데, 95년 30조9020억 엔에 달하던 총매출은 2010년 19조3800억 엔으로, 파친코점 수도 95년 1만8244개소에서 2010년 1만2323개소로 줄었다. 15년 사이 60% 정도 규모로 격감한 것이다.

    파친코 산업이 날이 갈수록 위축되는 이유는 일본의 오랜 경제 불황과 파친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된 데 있다. 우리나라는 2006년부터 이른바 ‘성인오락실’이라고 부르던 파친코를 불법으로 규정해 전면 금지했다. 하지만 일본은 파친코를 합법적 도박장으로 인정해 대도시 유흥가에서부터 지방 중소도시 주택가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퍼져 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하고 그만큼 중독자도 많다. 그러다 보니 파친코와 관련한 사회문제가 속속 발생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파친코 전면 금지’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다.

    파친코에 중독돼 불법 사채에 손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매년 여름만 되면 ‘파친코를 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다 파친코점 옥외주차장에 주차한 차량에 갇혀 일사병으로 사망한 어린아이들’에 대한 기사가 일간지를 장식한다. 파친코에 중독된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법매춘조직의 인신매매 등이 사회문제화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일본의 대표적인 여론게시판 ‘2ch(니채널)’ 등에선 ‘파친코 망국론’까지 논할 정도다.

    이 같은 파친코의 문제점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위험성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 일본계 정보기술(IT) 업체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조모(39) 씨는 “일본 본사에 파견 나간 선배 한 명이 파친코에 빠져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사채를 썼다가 발각돼 해고당하고 결국 직장과 가정을 모두 잃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자신도 일본 출장 시 파친코를 즐겼다는 조씨는 그 사건 이후 “파친코가 무서워졌다”며 일절 발을 끊었다고 한다. 조씨와 같은 회사에 재직했다는 김모(28) 씨도 “일본 주재원 시절 파친코에 빠져 벌어둔 돈을 다 잃고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며 “대박에 대한 꿈으로 시작한 파친코가 출입국관리소의 강제출국장행으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의 경고대로 파친코는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선 도박이다. 다른 모든 도박과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돈은 물론이고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게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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