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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명사들이 말하는 농촌 <마지막 회>

“농업선진화 이루려면 수출과 기술집약 농업 해야죠”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농업선진화 이루려면 수출과 기술집약 농업 해야죠”

“농업선진화 이루려면 수출과 기술집약 농업 해야죠”
서규용(64) 농림수산식품부(농식품부) 장관과 인터뷰하던 12월 7일, 농식품부는 정부과천종합청사(과천청사)를 떠나 세종시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떠나는 사람과 이삿짐으로 농식품부는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다. 직원들 표정에선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정든 사무실을 둘러보는 나이 지긋한 간부 직원이 여럿 눈에 띄었다. 이날 과천청사에는 온종일 눈발이 날렸다.

‘주간동아’와의 인터뷰는 서 장관이 과천청사에서 갖는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는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회한과 기대감을 내비쳤다.

“과천청사에서 근무를 시작한 게 1983년입니다. 그땐 저도 팔팔한 30대 서기관이었죠. 그땐 여기가 아주 황량했는데, 30년 세월 동안 조그마했던 나무들이 제법 아름드리가 됐네요. 오늘 오전엔 농식품부 직원들과 과천청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어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물론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감도 큽니다.”

서 장관은 12월 10일부터 세종시로 출근했다. 정부 부처 장관으로는 첫 출근이었다.

6개월 만에 고시 합격



서 장관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명문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농학과를 졸업했다. 기술고시에 합격해 1973년 10월부터 농림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채소과장, 식량생산국장, 농촌진흥청장 등 농림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농림부 차관이던 2002년 한중 마늘파동 때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29년 공직생활을 마감했지만, 이후에도 농어민신문 사장 등을 맡으며 농업현장을 지켰다. 2011년 6월 농림부 장관에 임명됐다.

▼ 농대를 나와 농림부 공무원이 됐는데, 원래 꿈은 뭐였나요.

“농대를 나와야 농림부 공무원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농대에 갔죠(웃음). 농림부 공무원이 되겠다는 건 어릴 때부터의 희망이었고요. 농삿일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못 먹고 못사는 농촌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싫었거든요.”

▼ 법대나 의대에 갈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가난을 좀 해결하자, 농민도 좀 잘살게 해주자 그런 생각만 하면서 컸어요.”

▼ 공부는 잘하셨나요.

“제법 했죠(웃음). 군 제대 후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복학해서 3학년 땐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이 주던 장학재단 장학생으로도 뽑혔으니까. 그때 대학등록금이 4만 원이었는데, 수업료 면제받고 당시 돈으로 20만 원을 장학금으로 받았어요. 내가 그 돈을 농사짓는 데에 보태라면서 아버지께 보냈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30만 원을 보태서 우리 과수원 옆에 1400평(약 4628㎡) 땅을 내 이름으로 샀죠. 내가 그 땅 때문에 장관 가운데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이 됐다니까(웃음).”

서 장관은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 땅을 팔아 장학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고 말했다.

▼ 기술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셨죠.

“네, 군 제대하고 딱 6개월 공부해서 붙었어요, 안 믿겠지만(웃음). 제대할 때 일등병 한 놈이 저한테 ‘서 병장님, 술 담배 끊고 공부 한번 해보세요. 뭐든 되실 겁니다’ 하더라고. 내가 그 말을 듣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술 담배도 그때 끊었죠.”

▼ 집안이 어려웠나요.

“그땐 농촌이 다 어려웠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입고 다니던 러닝셔츠가 기억나요. 하도 오래 입어서 앞뒤로 구멍이 난 셔츠, 뒤에 난 구멍은 그냥 두고 앞에 난 구멍만 겨우 기워서 입던 셔츠. 앞쪽은 가슴이 드러나니까 어쩔 수 없이 기워서 입으셨죠. 우리 집이 시골에서 조그맣게 과수원을 했는데도 사정이 그랬어요. 과일을 수확하면 그걸 리어카에 싣고 10리 이상 끌고 가서 팔았어요. 오고가다 신발이 해어지면 새끼줄로 신발을 묶어서 걷고. 연필이 없어서 학교 나무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친구들이 버린 몽당연필을 주워서 쓴 기억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왜 우리 농민은 가난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공무원이 된 뒤 서 장관은 자기 바람대로 농촌 가난을 해결하는 일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특용작물계장, 전작물계장, 채소과장 등을 지내면서 농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보성녹차 같은 특용작물 상품화가 그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그는 “당시 전국 농업 현황이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올바르고 공정한 인사가 만사

30년간 농림부 공무원을 지낸 그가 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올바르고 공정한 인사’였다. 장관에 취임해서도 그는 가장 먼저 인사문제에 손을 댔다. 인사지침을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인사가 만사’라는 게 내 오랜 믿음이다. 예측 가능한 인사가 이뤄져야 공무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 또 그래야 조직이 발전한다. 정치인에 줄이나 서는 그런 문화로는 조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 번은 유력 정치인이 저에게 인사청탁을 했는데 거부했어요. 그랬더니 ‘왜 부탁을 안 들어주냐’고 항의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장관이 그런 부탁이나 들어주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는 조직이 똑바로 서지 못한다’고 말이에요. 그 정치인은 아주 황당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걸 절대 용납 못 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도 안 되고.”

서 장관은 2001~2002년 농촌진흥청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사례도 들려줬다. 인사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과 믿음은 단호했다.

농촌진흥청장 재직 당시 서 장관은 연구원들을 상대로 ‘연구실적 마일리지’ 제도를 시행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저널에 실린 논문에는 100점, 국내저널에 실린 논문에는 20점을 줬다. 또 사과품종을 새로 만들면 100점, 채소 품종의 경우엔 20점을 주도록 매뉴얼을 만들었다. 불공정한 인사를 막자는 취지였다. 이렇게 해서 쌓인 마일리지가 1000점을 넘기면 연구관, 1500점을 넘기면 과장을 달아줬다는 것이다. 서 장관은 “이렇게 인사매뉴얼을 만들자 조직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연구관이 되면 1급까지 자동으로 올라가요. 그래서 다들 연구관이 되려고 혈안이죠. 연구사가 연구관에 오르려면 연구관들로부터 다면평가를 받아야 해요. 그 때문에 인사로비가 판을 쳤죠. 연구관 승진 대상자들이 밤마다 연구관들에게 밥 사고 술 사면서 인사청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면평가를 없애고 매뉴얼 인사를 시작한 겁니다.”

“농업선진화 이루려면 수출과 기술집약 농업 해야죠”
▼ 문화가 바뀌었나요.

“확 바뀌었죠. 밤마다 술 먹던 사람들이 이제 논문 쓴다고 난리가 났어요. 토플공부 한다고 영어학원에도 다니고요. 제가 ‘영어 논문도 하나 제대로 못 읽는 박사가 무슨 연구를 하느냐’며 어학시험 기준을 강화했거든요.”

▼ 효과가 있었나요.

“제가 처음 농촌진흥청에 갔을 때 논촌진흥청의 연구실적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어요. 당시 서울농대 교수가 100명이었고 농촌진흥청엔 박사가 650명 있었는데, SCI 논문을 기준으로 보면 농촌진흥청 연구실적이 서울대 농대의 20%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새 인사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실적이 많이 좋아졌죠. 농촌진흥청장 마치고 다음 해 차관이 돼 보고를 받아보니, 서울농대 대비 33%까지 올라갔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농촌진흥청 연구관들의 수준이 그때보다 더 높아졌어요. 이게 다 인사시스템을 바꿔서 만들어낸 성과죠.”

관운이 좋아 보이지만, 지금 자리까지 오는 동안 서 장관은 고생도 많이 했다. 기술고시 출신으로 농산물 품목을 주로 담당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래서일까. 서 장관은 “농업은 인간 노력만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고 믿는다. 그는 “언제라도 책임을 지고 떠난다는 각오로 일했다.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하늘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 그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요.

“많았죠.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아주 속이 다 타들어갔어요. 오죽하면 천주교 신자인 제가 석가모니 불상에 절까지 했겠어요. 비가 좀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요. 진짜 그런 일도 있었어요. 농업은 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면서 배웠어요.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욕심 부리지 않고 살려고 애를 많이 썼죠.”

▼ 장관으로 일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농정에 대한 농민의 불신을 해소하는 문제였어요. 그건 모두 소통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거든요. 신뢰를 쌓지 못해 생긴 일이죠. 그래서 저는 장관 취임 이후 주말마다 농민들을 만났어요. 그들의 얘기를 직접 듣고 농정에 반영하려 노력했죠. 아무리 열심히 정책을 펴도 배추 한 포기 값이 2만 원까지 치솟으면 불신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구제역도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위기관리능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큰 문제없이 1년 6개월이 지난 것에 감사해요.”

▼ 앞으로 농식품부가 역점을 둬야 할 정책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무엇보다 선진농업을 위한 농업 현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8번째로 큰 무역대국입니다. 수입 개방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죠. 농업을 선진화하지 않고는 우리 농업이 지속가능할 수 없어요. 농식품부가 올해를 선진농업의 원년으로 선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 농업을 선진화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텐데요.

“맞아요. 농업시설을 현대화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10조 원 정도 돼요. 그런데 정부가 집행하는 자금은 2450억 원(2011년 기준) 정도죠. 이런 식으로는 40년을 쏟아부어도 해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농민에게 1% 장기저리로 농업 현대화 자금을 빌려줘서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농업 현대화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년 1조 원 정도를 투자할 수 있다고 봐요. 이제 더는 쌀, 보리, 콩으로 승부를 볼 수 없어요. 과수나 화훼 등을 중심으로 한 수출 중심 농업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기술집약적인 농업을 해야 하죠. 다음 정부에서도 이 부분이 중요한 정책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주간동아 868호 (p34~36)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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