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5

2012.09.17

황금알 낳는 거위 밉다고 죽이지는 마라

‘순환출자금지법’ 한국 경제 뿌리째 뽑아낼 파장 우려

  • 오정근 고려대 교수·경제학, 아시아금융학회장

    입력2012-09-14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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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알 낳는 거위 밉다고 죽이지는 마라

    7월 16일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맨 왼쪽)가 국회를 방문한 경제5단체 상근부회장단 접견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경제민주화에 관해 규정한 헌법 119조.

    한국과 미국은 현재 똑같이 대통령선거(이하 대선)를 앞두고 있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오바마 현 대통령과 롬니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 첫 마디에서 이구동성으로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반면 한국은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첫 번째 공약으로 내걸고 경제민주화 법안 만들기 경쟁에 나섰다. 재벌을 ‘때려잡으면’ 모두가 잘사는 천국이라도 되는 양 재벌 규제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4만9601달러(2012년 국제통화기금 추정)인 미국은 일자리를 약속한 반면, 파이를 더 키워도 부족한 2만3680달러의 한국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제활동인구 2510만 명 중 상용근로자는 고작 1100만 명이고, 월평균 임금이 130만 원인 일용 임시직은 680만 명, 마지못해 하는 1인 자영업자 400만 명을 포함한 자영업자 720만 명. 당연히 근로자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자영업자는 죽기 살기식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민생고는 보이지 않는지 성장과 일자리 공약은 실종된 상태다.

    재벌을 때려잡고자 만든 법안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순환출자금지 법안은 한국경제를 뿌리째 흔들어놓을 우려가 큰 법안이다. 한국 재벌은 계열회사에 대한 출자를 통해 계열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삼성에버랜드 대주주(지분 25.1%)고,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생명 지분 19.3%를 소유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5%, 삼성전자는 삼성카드 지분 35.3%, 다시 삼성카드는 삼성에버랜드 지분 5.0%를 보유하는 식이다. 결국 이재용 사장은 삼성에버랜드를 지배하면서 계열회사 출자를 통해 삼성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마찬가지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 대주주(지분 5.17%)고, 현대차는 기아차 지분 33.88%, 기아차는 현대모비스 지분 16.88%, 다시 현대모비스는 현대차 지분 20.78%를 가지면서 현대차그룹을 지배하는 것이다.

    황금알 낳는 거위 밉다고 죽이지는 마라

    8월 28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입법포퓰리즘, 경제정치화 중단을 촉구하는 교수들’ 기자회견에 참석한 전국 대학교수 114명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야 ‘재벌 때려잡기’ 경쟁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 또는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와 같이 최종 피출자회사가 최초의 출자회사에 다시 출자하는 환상형 순환출자 구조다. 새누리당 법안은 이 최종 피출자회사가 최초의 출자회사에 다시 출자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지배주주가 재산 투입 없이 가공 의결권을 창출해 그룹을 지배한다는 점과 현재 한국은 상호출자가 금지돼 있는데 이러한 순환출자 구조는 우회적인 상호출자에 해당한다는 점을 든다. 따라서 신규 순환출자는 전면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는 의결권을 제한하자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듯 보인다.

    그런데 만약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의 순환출자 구조를 갖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에서 현대모비스→현대차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려고 현대차에 대한 현대모비스 지분의 의결권을 제한하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정몽구 회장은 현대모비스가 보유한 현대차 지분 20.78%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자신이 가진 현대차 지분 5.17%만으로 현대차를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도 지분율로는 안정적인 경영을 해나가기가 쉽지 않고 적대적 인수합병 위험에 노출된다. 결국 현대차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려면 기아차나 현대모비스 등 다른 계열회사 지분을 처분해 현대차 지분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주력기업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계열회사 지분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신성장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앞으로 한국은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지 암담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63개 대기업 가운데 삼성, 현대차, 롯데, 현대중공업 등 주요 15개 그룹의 지배구조가 순환출자로 연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4조3000억 원, 현대차는 6조1000억 원 등 6대 재벌그룹 순환출자 해소 비용만 14조6000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1237조 원의 1.2%에 해당하는 규모다. 투자승수효과까지 고려하면 2% 정도 성장률을 낮출 수 있는 막대한 규모다. 올해 2%대 성장을 전망하는 실정을 고려하면 메가톤급 파장이다. 신규 투자 없는 한국 경제는 왜소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일자리가 더 줄어들어 청년의 앞날은 캄캄해질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15개 그룹이 주력기업을 지키려고 내놓아야 할 계열회사 지분을 누가 사느냐 하는 문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400%가 넘었던 재벌 부채비율을 1999년 말까지 200% 이하로 낮추라는 바람에 일류 대기업 지분 60~70%를 헐값에 외국 기업에 팔았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포항제철, 현대차, 삼성전자 등 한국의 일류 대기업은 무늬만 한국 기업이고 실제로는 절반이 넘는 지분을 외국인이 소유하면서 해마다 배당금으로 막대한 국부가 유출되고 있다. 이번에는 외환위기 때보다 여건이 낫다고는 하지만 십중팔구 많은 계열회사가 헐값에 외국 기업 손에 넘어갈 공산이 크다. 이렇게 신규 투자를 못 해서 성장동력과 일자리는 줄고 많은 계열회사를 다시 외국인 손에 넘기면서까지 순환출자를 금지해야 할까.

    총수 일가 전횡 방지 미흡

    외국은 어떤가.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유명한 싱가포르 자딘메디슨그룹, 호주 엘더스그룹, 홍콩 신시어그룹, 일본 도요타그룹, 인도 타타그룹, 프랑스 루이뷔통그룹 등에서 보듯 외국에서도 순환출자 구조는 보편화됐다. 심지어 경영 안정화를 위해 대주주 지분에 대해서는 10~20배 차등의결권이나 거부권을 부여한 황금주제도도 도입했다. 외국에서도 보편화된 순환출자를 금지하자는 주장은 결국 한국 재벌구조 해체를 노린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한국 경제구조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데는 적은 지분으로 과도하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총수 일가의 전횡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가장 큰 요인이란 점을 모르지는 않는다. 외환위기 후 결합 재무제표 작성,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회 제도 도입 등 재벌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방지하려는 여러 제도를 도입했는데도 아직 미흡하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재계도 이 부분을 실효성 있게 개선해 순환출자금지 같은 주장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재벌 해체에 가까운 과도한 재벌개혁보다 총수 일가의 전횡을 방지하는 지배구조 개선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밉다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서야 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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