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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할린 한인 학살 자료 무용지물?

‘일본군 만행’ 러시아 문서는 단 두 줄…학살 조사기관 올해 말 활동 종료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사할린 한인 학살 자료 무용지물?

사할린 한인 학살 자료 무용지물?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돼 사할린 탄광에서 일한 한인 남성들(왼쪽)과 한인 여성들.

일본이 러시아 사할린 거주 한인을 대량 학살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는 러시아 문서가 최초로 공개됐다. 국가기록원(행정안전부 소속)이 러시아 연방기록관리청 산하 사할린기록보존소에서 입수해 8월 14일 공개한 옛 소련의 1940년대 보고서 초안이 그것이다. 이 문서는 많은 한인이 강제 징용된 에스토루(현 사할린 주 우글레고르스크) 지역의 인구 통계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사할린 한인 5000여 명이 감소한 이유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 가능성”까지 적시하고 있다. 공개된 보고서 내용은 이렇다.

“1945년 11월 1일자 자료에 따르면 사할린 에스토루에는 전쟁 전 8만 명(일본인 7만262명, 한인 1만229명)을 넘었던 인구가 1946년 초 약 5만6000명(일본인 5만424명, 한인 5332명)으로 크게 줄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 지역 인구 감소는 전쟁 중 소개(대피)와 러시아 남부 및 일본으로의 자발적 피난도 있겠지만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인 주민을 살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로써 “일본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소문에 대한 근거를 찾은 셈이다. 그동안 학계와 정부에서는 막연하게나마 ‘제2차 세계대전 후 퇴각하던 일본군이 패전에 따른 상실감으로 강제징용된 사할린 한인들을 학살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정부, 즉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피해자 조사를 통해 사할린 곳곳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는 증언을 확보했는데도 문서 자료를 찾지 못해 실태 파악이 어려웠다.

현재까지 정부가 밝혀낸 일본인이 학살한 사할린 한인 수는 46명뿐이다. 이는 강제동원위원회가 재판 기록이라는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사할린 가미시스카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학살 19명), ‘사할린 미즈호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학살 27명)를 벌인 결과로 알려진 것이다.

일본인이 학살한 사할린 한인 46명뿐?



이렇듯 기록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까닭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러시아 문서가 공개됐다는 소식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 학살 지역으로 지명된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자란 정장길(69) 씨는 “학살 관련 증거 자료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창 전쟁이 끝나 조선 사람들은 방공호로 들어가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우글레고르스크에 살던 일본인들이 방공호에 숨은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친구 아버지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다쳤다. 그뿐 아니라 레사고르스크에서도 학살 사건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을 때 학부형들이 ‘일본놈들이 한인을 붙잡아 가두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사할린에서 살다 2006년 귀국한 김옥순(74) 씨도 자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동생 2명과 함께 지리코로녜르비치에 살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니까 남자들은 피난을 나중에 보낸다기에 우리만 먼저 나왔다. 아버지가 우리 허리춤에 일일이 돈을 싼 보자기를 둘러매주면서 ‘조심히 가라’고 당부했는데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피난 나오던 아버지가 서류를 찾으러 다시 마을로 들어가자 일본군이 조선인 때문에 전쟁에 패했다면서 무자비하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상황이 워낙 무서워 동네 아저씨들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데 그때 아버지 나이가 40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제대로 먹이지 못해 그런지 한 달도 채 못 살았다. 어머니는 끝내 46세에 목매달아 돌아가셨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문서만으로는 사할린 한인 학살 실태를 조사하기 어렵다. 이 문서에서 한인 학살을 언급한 대목은 단 두 줄뿐이다. 이 자료를 번역 조사한 방일권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러시아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일본군의 학살 가능성이 적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데 의의를 두면서도 “문서 전체가 오지 않고 일부만 공개된 데다, 이 자료가 수기로 정리된 초안 성격이 짙기 때문에 학살 여부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할린 한인 학살 자료 무용지물?

국가기록원이 주최한 세미나를 통해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 가능성을 언급한 러시아 문서가 공개됐지만 이것만으로는 학살 정황을 파악할 수 없다.

사할린 현지 조사관 단 1명

게다가 이 문서를 찾아낸 국가기록원 특수기록관리과 관계자 또한 “관련 자료를 더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수기록관리과 연구관 3명이 해외에 흩어진 민간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 사할린 사안만 전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할린의 경우 2000년 국가기록원이 러시아 연방기록관리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적극적으로 자료를 열람할 수 있고, 현지 조사위원도 두고 있어 조사를 시행하기 수월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는 국가 내부 자료 공개에 인색한 편이라 자료를 찾으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여력이 없다”는 설명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국가기록원이 고용한 현지 조사위원의 전문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할린 교포에게 위임해 한인 학살 기록만 찾게 하다 보니 문맥은 물론, 문서 제목도 파악하지 않은 채 한인이 언급된 자료의 일부만 찾는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강제동원위원회가 조사 업무를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도 없다. 박인환 강제동원위원회 위원장은 “강제동원위원회 임기가 올해 말로 종료되기 때문에 학살 사건을 조사할 만한 추진력을 갖기 어렵다”고 말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2005년 한일 수교회담 문서 공개 후속 대책으로 2007년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을 내용으로 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자 두 업무를 통합해 지금의 이름으로 2010년 발족했다.

하지만 위원회 성립 근거에 따라 피해자 보상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강제동원위원회는 조사관 70여 명이 하루 평균 100여 건, 총 22만 건에 이르는 피해자 사례를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는 데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강제동원위원회가 장기적인 로드맵을 갖고 진상 규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활동 임기를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간동아 851호 (p40~41)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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