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8

2012.07.30

‘취업=결혼, 미취업=이별’ 살벌한 연애 방정식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2-07-30 10:0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 늦은 저녁 시각. 포장마차에서 직장인 두 명이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눈다. “내가 사표를…. 내자, 내자. 그래, 사표 내자.”

    청년백수의 상징인 ‘추리닝복’ 차림으로 방바닥을 뒹굴며 TV 속 대화 장면을 지켜보던 젊은이가 중얼거린다. “부럽다.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지, 어휴.”

    #2 책과 노트북을 펼쳐놓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젊은 여성이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출발이 늦은 사람이 아니라 준비를 더 충분히 한 사람일 뿐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부족한 점이 많다고 말하던가요? 그것은 그만큼 좋아질 점도 많다는 것입니다.”

    광고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사회를 읽는 코드다. 20, 30대 청년 실업자가 공식적으로 48만 명을 헤아린다. 구직을 아예 포기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청년실업 100만 명 시대’다. 하루에도 수차례 전파를 타는 앞의 두 광고는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공감 백배 광고’로 화제를 모은다.

    작가 지망생 L(34)씨는 대학 졸업 후 7년째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고 있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연애를 안 한 지가 5년이 넘었다. “현실을 외면한 채 대책 없이 꿈에만 매달린 사람과 계속 만나는 게 너무 답답하다.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게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 이유였다. L씨는 이제 와서 자기가 뭘 잘할 수 있는지, 어떻게 취직해야 할지 등 자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 그는 연애도 결혼도 반쯤 포기한 상태다.



    청년실업이 장기화하면서 갖가지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취업=결혼, 미취업=이별’이라는 젊은이들의 씁쓸한 연애공식이 한 단면을 드러낸다. 올해 2월 인터넷 취업포털 ‘커리어’가 2030구직자 34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미취업 탓에 연인과 이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 10명 중 3명꼴로 드러났다. 3명 중 2명은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다.

    청년실업 장기화 부작용 속출

    20대 후반 동갑 커플인 K씨(남)와 O씨(여). 함께 취업 준비를 하다 O씨가 취업하면서 둘 사이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회사 일을 익히기에 바쁜 O씨에게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 만남 횟수가 줄어들자 K씨는 서운함을 느꼈다. 두 사람의 생활 패턴과 관심사가 달라지면서 다툼이 잦아졌고 결국 참지 못한 O씨가 K씨에게 이별을 통보해 둘 사이는 끝이 났다.

    한편 29세 나이로 의대에 편입한 P씨는 여자친구가 결혼을 서두르자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직업도 없이 결혼할 수 없다”는 게 이별 이유였다.

    열정과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실연의 상처를 입고 ‘이별앓이’를 경험한다. 그런데 청년실업 혹은 미취업이 연인과의 이별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커리어가 설문조사한 결과, 연인에게 헤어지자고 한 이유(복수응답)는 ‘미취업 중인 모습을 보이기가 자존심 상해서’가 61.3%로 가장 많았다. 이어 ‘취업 준비로 연애할 시간적 여력이 없어서’가 54.8%를 차지했으며, ‘선물이나 데이트 비용 등이 부담돼서’라고 응답한 사람도 48.4%나 됐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등 구직 중인 자신을 무시해서’라고 응답한 사람은 19.4%였다.

    미취업 실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이별 이유는 먼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연애 상대방에게 집중하거나 신경 쓰기 어렵다는 점이다. 남성의 경우 기본적으로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본능이 있는데 그걸 못해주고 있다는 부담감 탓에 연애를 포기하곤 한다.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취업해도 이별로 이어지기 쉽다. 함께 취업을 준비할 때와 달리 어느 한쪽이 사회에 먼저 진출하면 그때부터 일상 패턴은 물론 사는 세계가 서로 달라지기 때문에 대화가 통하지 않고 마찰을 일으키다 결국 헤어지는 것이다. ‘출산’ 문제가 걸린 여성의 경우 나이와 결혼 시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남성은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운 데서 오는 갈등도 있다. 이 경우 여성이 먼저 헤어지자고 통보하기도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난 5년간(2007~ 2011년)의 건강보험 진료비 지급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심한 스트레스 반응 및 적응장애’(이하 스트레스)로 병원을 찾은 20, 30대 환자가 2011년에만 3만4346명에 달했다. 이는 2007년에 비해 5.0% 증가한 수치다. 한편 같은 연령대에서 ‘직장인’ 환자 수는 1만2136명인 반면, ‘비(非)직장인’ 환자 수는 2만3059명으로 직장인 환자보다 1만923명이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비직장인의 스트레스가 크다는 것.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 교수에 따르면, 최근 병원을 찾는 환자 10명 중 1~2명이 20대 후반의 대졸 미취업자다. 이들이 주로 호소하는 증상은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무력감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바라지만 막상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무력감에 빠져든다.

    김 교수는 “노력으로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지만, 그런 믿음이 없으면 자기 효능감이 낮아지고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면서 “여자친구를 찼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친구들은 그나마 자기 효능감이나 자존감이 남아 있는 경우다. 속을 들여다보면 여자친구한테 헤어지자는 얘기조차 못해서 직간접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도록 행동하는 친구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포세대’와 일자리 제공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쉽게 우울감이나 무력감, 절망감을 느끼면 자칫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김 교수는 “무력감이나 자기 효능감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청년 스스로 존재 의미나 자기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지금 당장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지만 더 큰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긍정적 인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가 인턴이든 봉사활동이든 청년들에게 뭐라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자기 효능감을 높이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이 취업 문제로 연인과 이별하고 나아가 ‘연애·결혼·출산 포기’로 이어지는 ‘삼포세대’의 증가를 막을 근본 해결책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회구조적 원인부터 살펴야 한다. 지난해 4월 ‘청년층 노동시장 진입 및 정착방안 연구’ 보고서를 펴낸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연구본부 남재량 박사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로는 대학을 안 나오면 결혼도 못 한다. 그러니 대학에 갈 수밖에 없고 대졸자가 너무 많아져 취업이 안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대학 졸업까지 많은 비용이 투자되기 때문에 청년들은 사회에 나와서 그만큼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는 많지 않다”고 분석했다.

    그는 “실력 있는 사람이 우대받는 능력 중심의 사회가 돼야 대학 진학률을 낮출 수 있다. 최근 고졸자 채용 확산은 현실에 비해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중요한 흐름”이라고 강조했다.

    ‘취업=결혼, 미취업=이별’ 살벌한 연애 방정식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