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6

2012.07.16

한두 번 요란 떨려면 차라리 하지 마!

페스티벌 공화국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2-07-16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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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두 번 요란 떨려면 차라리 하지 마!
    한국의 음악 페스티벌은 ‘규모의 경제학’을 연상케 한다. 처음 개최할 때부터 1만 명 이상의 관객유치를 목표로 한다. 막대한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대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를 끼고 만드는 건 외국 대형 페스티벌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제작 시스템이다.

    명실공히 세계 최대 페스티벌인 글래스톤베리는 후원을 일절 받지 않는다. 서머소닉, 후지록 같은 일본 페스티벌도 티켓 판매만으로 제작비를 충당한다.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들이니 문화 소비 수준 역시 높아서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1970년 잉글랜드 서머싯 주에 있는 글래스톤베리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마이클 이비스는 자신의 농장에서 음악 페스티벌을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런던에서 본 블루스 페스티벌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비스는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밴드 티렉스(T.Rex)를 섭외했고, 히피들이 잔뜩 몰린 가운데 글래스톤베리 뮤직페스티벌을 열었다. 티켓은 무료였다. 관객에게는 워시팜에서 생산한 우유를 제공했다. 그렇게 모인 관객이 1000여 명. 당연히 적자였다. 이비스는 이내 페스티벌을 포기했지만, 주변의 권유와 지원으로 몇 년 후 다시 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 30여 년간 글래스톤베리는 수십 개의 공식, 비공식 스테이지가 펼쳐지고 하루 15만 명씩 총 45만 명의 관객이 몰리는 세계 최대 페스티벌로 자리잡았다.

    이 페스티벌에 대한 관심과 믿음은 대단하다. 매년 6월 마지막 주말에 열리는데, 라인업은 그해 3월 발표한다. 티켓 판매는 그보다 이른 전년도 10월에 시작한다. 누가 출연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티켓 15만 장이 모두 팔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남짓. 오랜 세월 쌓아온 글래스톤베리라는 브랜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머소닉 또한 첫 회는 도쿄 인근 공원에서 단일 스테이지로 열렸다. 지금은 하루 평균 관객 10만 명이 모이는 초대형 페스티벌로 발전했다. 글래스톤베리든 서머소닉이든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작게 시작한 행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덩치와 퀄리티를 키울 수 있었다. 대기업이나 지자체를 끼고 일단 크게 질러놓고 시작하는 한국 페스티벌이 배워야 할 대목이다.



    한국에도 긍정적인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과 함께 가을 페스티벌 시장을 양분하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이 좋은 예다. 2007년 시작했는데, 페스티벌로는 드물게 흑자를 본다. 티켓이 예매로 전량 매진되기도 하지만, 헤드라이너로 해외 뮤지션보다 이적, 이소라 등 다른 페스티벌에 서지 않는 국내 뮤지션을 세워 제작비가 적게 드는 덕분이다. 또한 페스티벌을 시작하기 전 사전작업과 수요자 분석을 철저히 했다. 2006년부터 매월 민트페스타라는 이름으로 정기공연을 열었다. 여성 취향의 음악을 하는 인디밴드가 주로 참여했다.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할 수 있는 민트페이퍼라는 사이트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소비자 취향과 요구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이듬해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이라는 대형 페스티벌로 이어졌다. 대기업이나 지자체와 손을 잡지 않아도 성공적인 페스티벌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은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의 공로다.

    작은 페스티벌이 또 하나 있었다. 2003년부터 몇 년 동안 강원도 홍천 산골짜기의 별장 터에서 열린 러브캠프라는 이름의 행사다. 그곳 주인이 사이키델릭 음악 팬이었고, 주변의 뮤지션을 초대해 자기 별장에서 노는 날을 만든 게 그 시초다. 처음에는 히피와 뮤지션 수십 명이 밤새 공연을 하며 노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유명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대적인 홍보도 없었다.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2009년 별장이 불에 타 없어진 공터에 수백 명이 모였다. 그 많은 사람이 텐트를 치거나 노숙을 하며 밤새 공연과 디제잉을 즐겼다. 글래스톤베리가 그러하듯 라인업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같은 이상을 공유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해의 러브캠프에서 나는 글래스톤베리에 갔을 때 느꼈던 희열을 다시 경험했다. 러브캠프는 그 다음 해 주최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더는 열리지 않는다.

    이후 페스티벌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어떤 페스티벌도 그때 그 기분을 주지 못한다. ‘여가’로서의 페스티벌이 아닌 ‘공동체’로서의 페스티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지만 길게’ 볼 수 있는 페스티벌이 한국에도 한둘쯤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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