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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아이의 발길질, 엄마의 손길

아이의 발길질, 엄마의 손길

아이의 발길질, 엄마의 손길
열차의 윤곽

아이는 뱃속에서 발길질을 배운다

아이는 엄마의 위를 지나는 소리를 듣는다 열차를

타면 잠이 오는 건 그 소리에 자꾸 몸을 울리기

때문이다 열차의 통로에서 아이를 안으려다 엄마는



몸을 구부리고 아이에게 안기고 만다 안개는

산 능선을 녹여 먹는 질긴 뿌리를 가졌다

바닥을 온 힘을 다해 차면서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가고 있다

엄마가 손뼉을 치며 아이에게 손짓을 한다

자신에게 오라는 그 손의 손톱은 구부정한 품 안을

지나서 뒷모습을 가리킨다 아이는 자기를 만지고

싶어 하는 손을 따라 곧장 품속으로 들어가

등 밖으로 나가버린다 터널은 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어딘가를 향하지만 아이는 늘 중간에 있다

― 최정진 ‘열차의 윤곽’ (‘동경’ 창비, 2011 중에서)

아이의 발길질, 엄마의 손길

대학생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부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분히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늦가을이었고 곧 기말고사가 닥칠 예정이었다. 도서관에서 기말고사 공부에 필요한 책을 빌려 나오는 길이었다. 라디오에서 부산국제영화제가 7회를 맞이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문득 부산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부산에 영영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영화제의 현장에 있고 싶었다. ‘이건 운명이야!’라는 탄성이 ‘대학생이 되었으니 수업 빠지는 일탈 한 번쯤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라는 자기 합리화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부산에 가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교통편과 숙소, 영화를 예매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이었다. 한 임산부가 차멀미가 심한지 통로에 나와 있었다. 한 손으로는 배를 떠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린 채였다. 만삭이라 배가 풍선처럼 불렀다. 아이가 “뱃속에서 발길질을” 하는지 여인은 배를 연신 어루만졌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배를 쓰다듬는 여인의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흡사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듬는 모습 같았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였을 때. 엄마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구부정한 품 안”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을 때. 아무것도 몰라서 가장 투명했을 때. 어두컴컴한 “터널” 안으로 미끄러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몰랐을 때.

순간, 기차가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엄마는 몸을 구부리고 아이에게 안기고” 말았다. 아이가 있어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겨우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배 속에 있던 아이는 놀랐을까, 태연하게 잠자고 있었을까. 놀라서 배에 손을 가져다 댄 여인이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아이가 또다시 발길질을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하루빨리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다. “자기를 만지고 싶어 하는 손을” 자신의 심장 쪽으로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이다. 어떻게든 온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기차가 다시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를 다독이며 여인은 바다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아이는 아마 부산에서 태어날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27회를 맞이할 때쯤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영화를 관람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발길질, 엄마의 손길
아이가 크는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이다. 기차에서 내린 여인이 한 발 한 발 조심히 걷기 시작한다. “발길질을 배운” 아이도 곧 걸음마를 떼고 무럭무럭 성장할 것이다. 배릿한 바다 냄새를 가슴에 품고 묵묵히 “어딘가를 향”할 것이다. 안기는 법이 아닌 안는 법, 품는 법을 익힐 것이다. 시나브로 엄마에, 어딘가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2012.06.11 841호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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