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7

2012.05.14

케이팝의 뿌리 인디 밴드 파이팅!

‘서울소닉’ 프로젝트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2-05-14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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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팝의 뿌리 인디 밴드 파이팅!
    ‘한류’ 하면 아이돌을 떠올린다. 그러나 밴드도 꾸준히 해외 진출을 시도해왔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도는 ‘서울소닉(Seoulsonic)’ 프로젝트다. 아이튠즈에 한국 대중음악 음원을 공급하는 DFSB가 주관하는 서울소닉 프로젝트는 한국 밴드를 해외에 소개한다는 모토로 지난해 처음 시작됐다.

    이디오테이프, 갤럭시 익스프레스, 비둘기우유가 참여한 첫 회엔 캐나다 최대 음악 행사인 ‘캐나디안 뮤직 위크’를 시작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한 달여 강행군을 소화했다.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음악 콘퍼런스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에서도 공연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나 다름없던 첫 시도에서 서울소닉은 현지 음악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3월 9일~4월 11일 진행한 ‘2012 서울소닉 북미투어’에는 크라잉넛, 3호선 버터플라이, 옐로우 몬스터즈 등 세 팀의 밴드가 참여했다. 큰 도시 위주로 진행한 지난해와 달리 중소도시에서도 공연했다. 롤링스톤스와 더불어 미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스핀의 관계자가 코디네이터로 참여해 현지 일정을 조율했다. 지난해엔 한국 밴드끼리 공연했지만 올해는 현지 밴드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주목도를 높이고 교류 의미도 강화했다.

    밴드나 레이블의 해외 진출이 개별 뮤지션의 지명도를 높이는 효과에 머무는 반면, 서울소닉이라는 고유 브랜드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그보다 큰 이점을 갖는다. 케이팝(K-pop)의 다양성이나 한국 대중음악의 튼실한 속살을 과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이라는 변방에 이런 밴드가 있구나’ ‘한국에는 이런 다양한 음악이 존재하는구나’이 두 문장에 담긴 의미는 상당히 크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 의미의 폭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가능해진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한국 밴드의 음악적 독자성이 공고해졌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인디 신(scene)은 펑크, 그런지 등 동시대 서구 음악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에서 탄생했다. 10여 년의 나이를 먹는 동안 영국, 미국, 일본의 흐름과는 다른 독자성 있는 밴드가 등장하면서 인디 신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연주력과 사운드 메이킹의 비약적 향상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독자성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늘 새로운 음악을 찾는 팬과 미디어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세’가 사라진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영미권 팝스타들은 선배들이 누렸던 세계적인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음악 시장의 주도권을 인터넷과 공연산업이 차지하면서 예전 같은 융단폭격식 글로벌 마케팅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취향이 미분화한 까닭도 있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아이돌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음악 수준의 전반적 향상과 세계 시장의 수요 다변화가 아이돌과 인디에게 고르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해외 진출 시도와 성과가 철저히 독자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인디에 더 많은 박수를 쳐줘야 한다.

    1990년대 후반 문화정책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래 대중음악은 수출산업처럼 여겨졌다. 대중음악 정책은 해외 진출을 통해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시장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대형 기획사에 더 많은 기회가 갔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정책적 지원도 없이 스스로 해외 진출의 기회를 이뤄낸 인디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건 블록버스터와 작가주의(장르) 영화의 양면공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대중음악계에 빌보드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1980~90년대, 빌보드 톱 100 안에는 여러 장르의 음악이 공존했다. 다양성이 없는 문화는 예술이 아닌 트렌드일 수밖에 없다. 트렌드는 시간과 함께 사라지지만 예술은 시간과 함께 ‘가치’라는 물을 머금는다. 대중음악 정책의 노선을 재조정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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