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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판 아우슈비츠기념관 남산 안기부 터에 만들자”

인권·평화센터 건립 추진하는 인권활동가 박래군

  • 육성철 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ysreporter@daum.net

“한국판 아우슈비츠기념관 남산 안기부 터에 만들자”

“한국판 아우슈비츠기념관 남산 안기부 터에 만들자”
“남산 안기부 터를 인권·평화의 숲으로 만듭시다.”

인권활동가 박래군 씨(52·재단법인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역사의 진실을 되찾기 위한 ‘인권꽃씨(namsan.hrcenter.or.kr)’ 시민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부터 군사정권의 억압통치에 이르기까지 치욕과 상처로 얼룩졌던 남산 자락에 한국판 아우슈비츠기념관을 만들자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요즘 남산에 파묻힌 공포정치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박씨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의 재인식이라고 못 박았다. 멀게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좌절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해체로 이어진다. 이대로 가면 범죄 흔적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이 그의 발걸음을 남산으로 돌려놓았다.

1970~80년대 남산 중턱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핵심 권력기관이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작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최종길 교수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이 모두 남산의 정치공작이었다.

그 시절 남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인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차량 방향이나 산꼭대기에 솟은 타워를 보고 막연히 남산으로 추정했을 뿐이다. 피해자들은 한밤중에 연행돼 죽도록 얻어맞으며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한다. 가족의 면회를 거부하고 변호인 접견까지 차단할 수 있었던 ‘정부 위의 정부’ ‘헌법 위의 권력’이 바로 남산이었다.



잊을 수 없는 공포정치의 상징

남산의 실체는 안기부가 1994년 내곡동으로 옮겨간 뒤에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던 자취마저 일방적으로 파괴하거나 생뚱맞게 덧칠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안기부 내에서도 보안시설로 분류됐던 제1별관은 1996년 폭파 해체돼 지금은 공터로 변했다. 조작간첩 사건을 수사하던 5국은 서울시 별관으로, 학원 사찰을 전담하던 6국은 서울시 도시안전실로 바뀌었다. 또한 안기부장 공관은 ‘문학의 집·서울’, 안기부원 체육시설은 남산창작센터가 됐다.

남산 안기부 지휘부는 안기부장이 머물던 본관이었다. 1973년 유럽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조사받던 최종길 교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 혐의자로 고문을 받던 현장이 바로 여기다. 그러나 이곳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서울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해 원불교 삼동청년회가 위탁운영하고 있다.

박씨는 6층짜리 유스호스텔 건물 어딘가에 반드시 과거의 기억을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경구처럼 상처의 역사라 해도 기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남산 안기부 터를 중심으로 서울 한복판에 인권도시 테마루트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 유관순 열사 등 독립운동가가 수난을 겪었던 서대문형무소까지 하나로 묶자는 구상이다.

“국가 범죄는 감추고 묻어두기보다 찾아내서 알려야 할 문제입니다. ‘조작간첩 공장’으로 불리던 안기부 5국 지하 고문실을 다 뜯어내고 서울시 서고로 만들었어요. 그 자리를 평범한 서고로 둬야 할지, 아니면 원형대로 복원해야 할지 이제 시민이 직접 요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거의 상처를 지워버릴 게 아니라 차라리 ‘고문박물관’으로 보존하는 것이 성숙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박씨의 바람과는 달리 남산 안기부의 흔적은 계속 사라져왔다. 한때 40여 동에 이르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중 상당수가 이미 없어졌다. 정보기관의 성격상 언제 철거됐는지에 대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설상가상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2009년 ‘남산 르네상스’ 종합 계획안을 발표하면서 구(舊) 안기부 건물을 대부분 철거하고 서울 성곽과 봉수대를 복원한다는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한일합방 100주년을 앞두고 전격 공개된 남산 르네상스는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남산 안기부 터 보존과 일제 통감관저 복원을 촉구한 유명인사 중엔 박원순 서울시장도 포함돼 있다. 때마침 민족문제연구소는 구한말 자료를 뒤져 한일합방이 체결됐던 통감관저를 찾아내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놀랍게도 조선 국권을 일제에 넘겨준 자리와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 막사를 처음 설치한 장소는 나란히 붙어 있다. 역사적 우연치고는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씨가 인권·평화센터 건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건 지난해부터다. 영세한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인권운동이 시민과 폭넓게 만날 수 있는 허브를 만들자는 게 취지였다. 그러나 서울 사대문 안에서 수십㎡가 넘는 사무실을 구하는 건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대다수 인권단체가 월세로 전전하는 빠듯한 살림을 감안할 때 어림잡아 10억 원이 드는 인권·평화센터는 먼 훗날의 꿈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호응

“한국판 아우슈비츠기념관 남산 안기부 터에 만들자”

“역사의 상처를 지우지 말고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달라졌다. 박씨는 벌써 목표액의 절반에 가까운 4억5000만 원을 모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일반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늘어난 점이 고무적이다. 경기 군포시에 사는 중학교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저금통을 모아 전달했고, 파주의 장애인단체 활동가는 100여 명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성금을 기탁했다. 기존 인권단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유명인사의 동참도 이어졌다. 소설가 공지영 씨는 이상문학상 상금 1000만 원을, 금태섭 변호사는 저서 ‘확신의 함정’ 인세 600만 원을,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받은 인권논문상 수상 상금을 기부했다. 이 밖에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고(故)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 씨가 500만 원을, 조작간첩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을 받은 유족이 1억 원을 내놓았다.

박씨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호응이다. 그는 “사회 전체의 인권상황이 후퇴하면서 시민이 인권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가 지도자가 인권 자체를 언급하지 않고 권력기관이 법을 무시하는 행태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사 청산 실패, 소수자 차별, 노동운동 탄압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박씨는 이명박 정부 초기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구속됐다.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제를 기획하고 도로교통을 방해했다는 게 죄목이었다. 그는 수사기관이 제시한 8000쪽의 기록 중 절반이 이메일 자료임을 확인하고 놀랐다고 한다. 수사와 무관한 지인과의 사적인 편지까지 뒤지는 건 명백한 인권침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메일 서버를 압수수색하고 6개월 뒤에야 통보하는 수사관행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 말기 그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의 배후조종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수사기관은 박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촬영해 증거로 제시했다고 한다. “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스케줄까지 관리해주는 건 고맙지만(?), 사적인 미팅까지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는 관행은 시정돼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박씨는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 씨의 친형이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인권운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그에게 인권·평화센터 건립은 인권활동가로서의 마지막 꿈이다. 지금은 인권운동 진영의 맏형으로 살지만 60세가 되면 다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싶단다. 2020년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8년이다. 그는 연세대 국문학과에 다닐 때 소설가를 꿈꿨다. 그가 소설을 맘껏 쓸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란다.



주간동아 836호 (p52~53)

육성철 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ysreporte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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