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0

2017.05.31

국제

북한 영향력 확대 나선 러시아의 노림수

만경봉호 운항 계기로 북·러 경협 더욱 강화…미국의 대북제재에 몽니 시각도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7-05-30 17:33:59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수도라는 말을 듣는 항구도시다. 동해와 태평양에 접해 우리는 주로 연해주라 부르던 곳으로,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 모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육상으론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역이고, 해상으론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교통요충지다. 옛 소련은 군사기지가 있다는 이유로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군항의 기능만 담당하던 블라디보스토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방정책에 따라 극동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허브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동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을 발판 삼아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적극 진출한다는 푸틴 대통령의 동방정책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핵심 거점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북한 화물여객선 만경봉호가 5월 25일부터 매주 1회 블라디보스토크와 나진항을 정기운항해 주목받고 있다. 만경봉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1992년 김일성 탄생 80주년과 김정일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북한에 보내온 40억 엔(약 400억 원) 상당의 자재를 사용해 청진조선소에서 만들었다. 길이 162.1m, 너비 20.5m, 총 배수량 9672t, 정원 200명, 화물적재량 2000t인 만경봉호는 2000년대 중반까지 북한 원산과 일본 니가타를 오가는 북·일 관계의 상징과도 같은 배였다.



    푸틴 동방정책의 핵심 거점

    북한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단행하자 일본 정부는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만경봉호의 입항을 금지했다. 북한이 만경봉호를 통해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정밀기기나 부품을 몰래 반입할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만경봉호는 북한에서 나진과 고성을 오가는 여객선이나 해군대학의 연습선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노후화로 5년 전부터는 나진에 폐선처럼 방치돼 있었다.



    이 배를 지난해 5월 러시아 해운회사  ‘인베스트 스트로이 트러스트(IST)’가 인수했다. 선체 수리를 모두 마친 만경봉호는 5월 17일 나진항에서 승객 40여 명을 태우고 시험항해에 나서 18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는 해상 정기 화물여객선이 취항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옛 소련 시절에도 해상 여객선 운항은 없었다. 현재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는 블라디보스토크~평양을 주 2차례 운항하는 항공 노선과 두만강을 지나가는 철도 노선만 있다.

    만경봉호는 앞으로 북한과 러시아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 연결고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IST는 만경봉호를 이용해 북·중·러 3국 패키지 여행상품을 구매한 중국·러시아 관광객을 운송하는 한편, 북한제 의류나 러시아산 해물과 생필품을 실어 나를 것으로 예상된다. 블라디미르 바라노프 IST 사장은 “북한과 러시아 간 철로 수송은 나흘에 한 번뿐이라 한계가 있다”며 “항로를 이용할 경우 편도 9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다”고 밝혔다. 만경봉호 운항은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의 ‘숨통’을 틔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만경봉호 취항은 러시아와의 경제협력과 관광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만경봉호 운항이 마뜩잖은 눈치다. 미국 국무부는 “러시아 정부는 북한을 오가는 여행객의 개인 짐을 비롯한 모든 화물의 검색 책임을 포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270호와 2321호를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만경봉호 운항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의주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반발에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마리야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은 “만경봉호 운항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알렉산드르 갈루시카 극동개발부 장관도 “러시아 정부는 안보리 결의를 지지하며 이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북한과 협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정부가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만경봉호 운항에 적극 나선 것은 무엇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해 극동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현재 극동지역에서 캐낸 석탄을 나진항을 통해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러시아 물류의 중간 기착지인 나진항이 발전할수록 러시아에 이득이 된다. 러시아는 앞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원산을 연결하는 관광 항로 개발도 추진해 3국 패키지 관광을 더욱 확대할 방침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양측은 농업협정을 맺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채소 재배와 목축, 농산물 가공공장 등을 공동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극동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

    반대로 국제사회의 제재로 외화벌이 창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서 러시아로의 진출은 북한에겐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 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3만2000명에 달한다.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한 러시아대사는 “북한 노동자들은 매우 근면하고 훌륭한 일꾼”이라며 “러시아는 앞으로 더 많은 북한 노동자가 일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8월 1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입국하는 18개국 여행객에게 기존 비자 대신 전자비자(e-VISA)를 발급할 예정인데, 이 조치에 북한도 포함됐다.

    러시아가 북한과 관계를 강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틈을 이용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도 옛 소련 붕괴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러시아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북한의 속셈은 중국 대신 러시아를 통해 미국의 압박과 제재를 돌파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원유를 제외한 석유와 천연가스 310만 달러(약 34억7000만 원)어치를 북한에 수출했다. 러시아는 중국이 공급을 중단한 제트연료도 북한에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트연료를 포함한 항공유 수출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에 따라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북한의 4·5차 핵실험에 따른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 당시 몽니를 부려 일부 제재 내용이 완화되고 절차가 지연되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는 북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견제하려는 속셈도 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북한이 5월 14일 KN-17 중거리탄도미사일(북한명 화성-12형)을 시험발사한 것을 비판하면서도 “관련국도 북한에 대한 위협을 중단하고 평화적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 발언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도 “북한에 대한 고립 정책이 북한 지도부의 핵·미사일 개발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 연방안보회의는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처럼 국가안보정책을 조정·통합하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의장은 대통령이 맡고 서기는 실무 총책이다.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에 따른 제재조치를 계속 유지하는 미국을 압박하고자 일종의 ‘북한 카드’를 활용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한반도 통일을 주도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크렘린궁은 한반도 38도선 북쪽에 대한 기득권을 여전히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