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3

2012.04.16

‘정책’은 힘 못 쓰고 정치와 후보만 득세했다

19대 총선에서도 정당정치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

  • 김춘석 한국리서치 수석부장

    입력2012-04-16 09: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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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은 힘 못 쓰고 정치와 후보만 득세했다

    1 1월 15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9명의 후보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월 16일 오전 여의도 새누리 당사에서 열린 새누리당 현판식에 참석해 현판을 걸었다.

    19대 총선은 이명박 정권 임기 5년 차이자 차기 대선을 8개월 앞둔 시점에 치른 선거다. 이런 점에서 정권에 대한 평가를 담은 선거인 동시에, 차기 대선 전초전이라는 두 가지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4·11 총선은 역대 어느 총선보다 정치 선거로 흐를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정책선거가 뒷전으로 밀릴 것이라는 우려와 유력 대선후보들이 선거 전면에 나서서 사활을 건 승부를 펼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 같은 징후는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후부터 감지됐다.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수도 서울의 행정수장을 선출하는 선거에 머무르지 않았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정권심판 성격을 가미한 두 번째 정치 선거였다. 여야가 총력전을 펼친 결과 야권이 승리했다.

    유력 대선후보들 전면에 나선 대결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여당은 내분에 휩싸였고, 결국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했다. 올해 2월에는 14년 이상 유지해오던 한나라당이라는 간판을 새누리당으로 바꿔달았다. 이 같은 조치는 총선 너머 대선까지 예비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야권도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정비에 들어가 민주당, 시민사회세력,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하나가 돼 민주통합당을 창당했으며, 1월 15일에는 한명숙 지도부가 출범했다. 더불어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 작업도 추진했다. 야권도 대선 예비선거로서 총선을 준비한 것이다.



    이번 총선에 담긴 정치적 의미가 남다르다 보니 승패에 대한 관심도 유달리 높았다. 어느 당이 다수당이 될 것인가. 과반 의석을 넘긴 정당이 나올 것인가. 유력 대선후보 중 누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인가.

    갖가지 예상 시나리오가 총선 이후 대선과 연관 지어 분석됐다. 그러다 보니 공직후보자추천(이하 공천) 직후부터 선거 직전까지 정치권은 유권자의 표심을 얻으려 다양한 노력을 했다. 상황에 따라 여야 희비가 교차했다. 여야 양쪽 진영에서 다양한 이슈를 제기했으며, 그에 대응하려는 반박과 함께 또 다른 이슈를 양산했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관되게 관통하는 대형 이슈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2년 대선에서의 세종시 논쟁, 2004년 총선에서의 대통령 탄핵, 2006년 지방선거에서의 민생, 2007년 대선에서의 경제성장, 2008년 총선에서의 뉴타운, 2010년 지방선거에서의 무상급식 및 천안함 사건과 비교할 때 이번 4·11 총선에서는 선거를 규정할 만한 정책적, 정치적 이슈가 없었다는 점이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형 이슈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황적 이슈인 정권심판과 야권연대, 정책 이슈인 경제민주화와 복지, 현안 이슈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선거 단골메뉴인 북풍(북한 로케발사) 등 폭발적 이슈가 적지 않았다. 또한 이들 이슈를 쟁점화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실현의 적임자를 찾는 것을 공천의 주요 잣대로 삼았다. 새누리당은 ‘가족행복 5대 약속’을 내걸고,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범야권 공동정책 합의문’을 통해 정책선거를 표방했다. 민주통합당은 ‘이명박(MB) 정권 비리 및 불법비자금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권력형 비리를 전 방위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정권심판론에 불을 지피려 했다.

    정책과 정치적 이슈 없이 엎치락뒤치락

    ‘정책’은 힘 못 쓰고 정치와 후보만 득세했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슈 가운데 이번 선거를 규정할 만한 것을 딱히 꼽기 어렵다. 왜 그랬을까. 이번 4·11 총선 과정을 되짚어보자.

    연초에는 민주통합당의 단독 과반의석이 가능하다는 전망이 다수를 차지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간 연대가 순탄치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통합당 내에서도 단독으로 과반의석을 차지할 수 있는데 굳이 통합진보당과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단독 과반의석 전망은 비단 민주통합당 차원의 희망사항만은 아니었다. 올해 1월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은 당내 대표 선출을 위한 2008년 전당대회에서 금품이 살포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는 한나라당 지도부가 한나라당 간판으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당대회 금품살포가 계기적인 사건이었다면 권력형 비리는 구조적인 여건이었다. 권력형 비리는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어지간한 수준의 비리에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대형 이슈가 속출했다. BBK,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후보 홈페이지 디도스(DDoS) 공격, 해외 자원개발 비리, 부산 저축은행 비리, 형님(이상득, 최시중) 측근 비리, 이국철 SLS그룹 회장 관련 비리, CNK 주가조작 의혹, 내곡동 사저 논란,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한 이슈를 정치권과 언론,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 등에서 연일 제기했다.

    그런데 야권 완승 분위기는 각 당의 공천 과정을 거치면서 달라지는 조짐을 보였다. 새누리당은 친이(친이명박) 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현역 25% 컷오프 룰을 적용했으며, 탈락한 후보의 무소속 출마 분위기를 김무성 의원의 백의종군 선언으로 무마했다. 또 공천을 받았더라도 논란이 된 후보는 대부분 과감하게 공천을 취소함으로써 유권자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공천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임종석 전 사무총장의 후보 자격과 관련한 논란, 일부 후보의 도덕성 논란, 비례대표 공천 과정에서의 계파 간 갈등 등으로 새누리당보다 평가가 좋지 않았다.

    또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나선 서울 관악을에서 여론조사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야권의 공천 전반에 대한 평가가 더 부정적으로 변했다.

    이를 계기로 통합진보당의 한 계파로 알려진 경기동부연합과 관련한 논쟁이 공식 선거 초반 쟁점 이슈로 떠오르면서 야권연대나 후보단일화의 효과가 반감됐다. 이뿐 아니라 야권의 승부수라 할 수 있었던 정권심판론을 이슈화할 여지가 봉쇄됐다. 정권심판론을 제기할 내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야권에서 정권심판론을 제기할 시점을 놓쳤기 때문에 정권심판론이 야권이 기대한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유권자들은 ‘이념 논쟁과 정치 논쟁을 일삼는 거대 야당이 국회를 장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야당견제론을 제기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호소를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표2에서 알 수 있듯, 정권심판론과 야당견제론 모두 공감하는 유권자가 38%로 가장 많았고, 정권심판론에만 공감하는 유권자(27%)와 야당견제론에만 공감하는 유권자(23%)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정권심판론이 부각되지 못한 상황에서 KBS 새 노조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내용을 담은 문건 2619건을 인터넷에 공개함으로써 민간인 불법사찰 논란이 촉발했다. 이번 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이 핵심 이슈로 부각될 수 있는 계기적인 사안이었다. 그런데 폭로 문건의 80% 이상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뤄진 공무원 감찰과 관련된 것이라는 청와대의 공세가 있은 후 이 이슈는 현 정부나 전 정부가 별반 차이 없다는 피장파장론으로 선회했다.

    선거학회와 한국리서치가 4월 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민간인 불법사찰 논란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41.4%)보다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응답(52.2%)이 더 높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한 비율이 30대, 진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지지자에서 특히 높다는 점에서 관련 이슈가 상황에 따라 지지 성향을 바꾸는 스윙보터(swing voters·40대, 중도, 무당파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기보다 지지자의 지지를 강화하는 데 그치는 제한적 효과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정책’은 힘 못 쓰고 정치와 후보만 득세했다
    선거 막판 정권심판론 vs 막말파문

    선거 막바지에 서울 노원갑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막말 파문이 터졌다. 김 후보가 과거 인터넷 라디오방송에서 했던 여성 관련 막말이 밝혀졌고 연이어 노인, 개신교, 20대 등과 관련한 그의 발언 및 행태를 일부 언론이 폭로했다. 급기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후보직 사퇴를 권고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김 후보는 사퇴하지 않고 완주했다.

    김용민 후보 파문은 사안의 본질상 문대성 새누리당 후보의 논문 표절 논란이나 김형태 후보의 성추문 논란 같은 개인 차원의 문제로 국한될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공세와 일부 언론의 집중 조명으로 전국적 이슈로 부상했고, 선거 막판에 ‘정권심판론 vs 막말파문’으로 구도화되기까지 했다.

    김용민 후보의 막말 파문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가늠키 어렵다. 그렇지만 정권심판론을 희석화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뿐 아니라 최소한 서울 노원갑 선거에는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번 19대 총선은 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음에도 그렇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정치가 정책을 압도한 선거, 후보가 정당에 우선한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아직 정당정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내 제1당은 선거에 임박해 당명을 바꾸고 정강정책을 수정했다. 원내 제2당은 리빌딩을 했고, 더 진보적인 정당과 연합을 추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 이념과 정강정책에 기반을 둔 이상적인 정책선거를 기대하기는 근본적으로 어렵다 할 것이다. 국민은 언제까지 정치가 정책에 우선시하고, 후보가 정당을 가리는 선거에 동원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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