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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전남 경찰 큰 별, 감동으로 살다 갔네

故 박영헌 전 청장 남다른 후배 사랑…봉사와 희생 그 정신 영원한 귀감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전남 경찰 큰 별, 감동으로 살다 갔네

전남 경찰 큰 별, 감동으로 살다 갔네

(왼쪽)국토 서남쪽 끝 전남 신안군 가거도에 위로방문을 갔던 박영헌 전 청장(왼쪽에서 두 번째). 그 역시 젊은 시절 도서지역에서 근무를 했다. (오른쪽)축구는 박 전 청장에게 직원들과 땀을 흘리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매개체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고(故) 박영헌 전남지방경찰청장(57)은 산을 좋아했다. 매일 아침 4시 30분이면 무등산을 오른 뒤 출근했다. 산을 오르다 바위에 앉아 쉴 때면 ‘청산은 나를 보고’를 흥얼거렸다. 우리 가락과 소리꾼 장사익 씨의 목소리를 좋아했던 박 전 청장은 특유의 가락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산을 오를 때면 박 전 청장은 유심히 야생화를 살폈다. ‘야생화 박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어느 날 박 전 청장의 처남 권상문 씨가 ‘이름 모르는 잡초’에 애착을 갖는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박 전 청장은 “야생화를 잡초로 여기고 대충 지나치면 그 매력을 알 수 없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꼼꼼히 뜯어볼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경찰 조직의 뿌리를 이루는 수많은 하위직 경찰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전 청장은 1980년 경찰 간부후보 28기(경위)로 임관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철도고를 졸업하고 철도청에서 2년 근무한 뒤 다시 총무처(현 행정자치부)에서 1년을 근무했지만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갈망에 경찰복을 입기로 결심했다. 경찰이 된 뒤 그는 경찰 조직에 헌신했다. 특히 후배들, 하위직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한 경찰은 “고인은 늘 선배에게 사랑받는 후배보다 후배에게 존경받는 선배가 되고 싶어 했다. 학벌도, 끈도 없이 성공해 선배들에게 괄시를 받기도 했지만 후배들에게만큼은 확실히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경정 시절 그의 후배 사랑은 전설이 됐다. 1993년 생긴 전남경찰청 기동대장으로 임명돼 4년을 복무하며 2000명이 넘는 대원을 관리했지만 자체 사고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당시 기동대 행정계장으로 근무한 전남경찰청 정현 감사계장은 “시위가 빈번했던 때라 대원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관리하기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인은 덕망이 두터워 대원들을 친형제처럼 다독이며 조직을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1996년 일화가 있다. 시위를 진압하고 돌아온 한 의무경찰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연인즉 검거된 시위 가담자 중 의경의 아버지가 있었다. 이 사연을 전해들은 고인은 그 자리에서 시위 가담자를 풀어주고 의경에게 휴가를 주었다. 기동대원들도 이에 크게 감격했다.



하위직 직원 위해 늘 지갑 열어

‘경찰의 꽃’ 총경, ‘경찰의 별’ 경무관이 된 뒤에도 그는 바뀌지 않았다. 일선 경찰서 서장 시절 그의 지갑은 늘 열려 있었다. 일선 서에서 함께 근무했던 전남경찰청 정황영 경위는 “고인은 퇴근길에 마주친 직원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파라솔 아래로 불러 아이스크림, 음료수 등을 사주며 격려했다. 권위적인 시절이라 윗사람이 먼저 직원들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은 파격이었다”고 말했다. 광주 동부서 서장으로 재직할 때는 하위직 직원들에게 매번 술과 음식을 사주느라 고인의 지갑이 텅텅 비자 경무계장이 지갑을 빼앗아 보관하기도 했다.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두터운 만큼 인사철이 되면 괴로워하며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었다. 아내 권복화 씨는 “누구는 승진을 시키고, 누구는 탈락시켜야 할 때 가장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려 인사를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서장 시절부터 내부게시판을 통해 인사고과 순위를 공개해 잡음을 줄였다.

철저한 업무처리, 주변 직원들의 신망 덕에 그는 고졸 출신 일선 서장이란 한계를 딛고 경무관 자리에 올랐다. 경무관 승진 뒤 인천지방경찰청 차장, 경찰청 정보통신관리관을 지냈다. 2007년 치안감으로 승진해 경찰청 수사국장을 지냈고 2008년 3월 전남경찰청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부임 당시 인사말을 직원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진짜 여러분이 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승진했고 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의경, 전경들의 생활까지 꼼꼼히 챙기는 자상한 지휘관이었지만 업무에서만큼은 철두철미했다. 박 전 청장은 전남경찰청장으로 취임한 뒤 항상 “치안의 기본은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22개 시군으로 구성된 전라남도 전 지역에 경찰의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 특히 지역책임제 근무를 강화해 일선 경찰이 맡은 구역의 주민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접촉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주민들도 “예전에는 전혀 안 보이던 경찰이 수시로 마을에 찾아와 처음에는 의아했다. 이제는 경찰이 늘 옆에 있어줘서 든든하다”고 전남경찰청에 알려왔다.

경찰 본연의 업무인 치안과 관계없는 업무는 과감히 줄였다. 전남경찰청 백형석 감찰계장은 “고인은 ‘쇼’를 할 필요가 없다며 이벤트성 행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본청의 지침에 충실할 뿐 쓸데없는 일로 부담을 주지 않아 일하기 편했다”고 말했다. 박 전 청장은 부임 직후 으레 하는 초도순시를 생략해 일선 경찰서의 부담을 줄였다. 청장실 문턱도 낮췄다. 결재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문을 열었고, 과·계장이 보고할 때는 담당 직원도 함께 해 소통의 범위를 넓혔다. 전남지역의 농민단체, 노동계, 학생운동권 관계자와 만나는 일도 적극적이었다. 청장부속실장으로 근무한 정 경위는 “고인이 거리낌 없이 여러 사람을 흔쾌히 만나니 시위 단체들과 분쟁도 줄어 결국 직원들이 일하기 편했다”고 말했다.

치안감이 된 뒤에도 소탈함은 변치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술과 안주는 막걸리와 돼지부속이었고, 골프 한번 친 적이 없다. 그 대신 축구와 테니스를 즐기면서 순경부터 간부급 직원까지 땀을 흘리며 소통했다. 치안감이 된 후, 전임지의 하위직 직원이 건 안부전화를 받지 못하면 다시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이런 소탈함 때문에 장례식장에는 순경, 경장 계급 경찰들이 휴가를 내 찾아오기도 했다. 경찰대 출신의 전남경찰청 소속 한 경찰은 “박 전 청장이 서울로 가서 고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박 전 청장 자신은 후배들을 대할 때 벽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애통해했다.

박 전 청장은 전남경찰청에서 1년을 근무한 뒤 경찰청 생활안전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달 뒤 폐암 선고를 받고 “조직에 누가 되기 싫다”며 명예퇴직을 했다. 건강이 회복돼 광주교통방송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끝내 12월 14일 운명했다.

“오로지 가족에게 미안할 따름”

마지막 투병 생활은 아내와 두 딸이 함께했다. 큰딸은 직장까지 그만두고 두 달 동안 병간호에 매달렸다. 그는 경찰 조직에서 늘 최고의 선배였지만 100점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일에 바빠 가족과 함께 놀러 간 기억도 없다. 생활도 검소했다. 박 전 청장은 2009년 3억여 원의 재산을 신고해 치안감 이상 경찰 고위간부 중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발표가 난 날 그의 아내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꼴찌라니 어떻게 하느냐”는 위로 전화를 받기도 했다. 많은 고위공직자의 아들과 딸이 ‘똥돼지 특혜’를 누렸지만 고인은 자녀와 관련해 사소한 부탁도 한 적이 없다. 이런 검소함에 감동한 전남경찰청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병원비를 모았다. 아내 권씨는 남편에 대해 “늘 경찰 조직을 앞세웠던 분”으로 기억한다. 박 전 청장은 세상과 이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두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다음 기회가 생기면 가족들에게 잘하고 싶다. 하지만 경찰 조직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했고 이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주간동아 2010.12.27 768호 (p48~49)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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