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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30

평생 짓누른 당쟁의 파고 나약한 재위 4년 원인이었나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의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평생 짓누른 당쟁의 파고 나약한 재위 4년 원인이었나

평생 짓누른 당쟁의 파고 나약한 재위 4년 원인이었나

1 지붕 위를 장식한 의릉 정자각의 잡상. 2 동원상하릉 형태의 의릉. 곡장이 있는 봉분이 경종의 능침이고 아래 능침이 선의왕후 능침이다. 동원상하릉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과 더불어 두 곳뿐이다. 3 정자각 정청의 옆면에 익랑을 덧붙인 형태는 휘릉, 숭릉, 익릉, 의릉에서만 볼 수 있다.

의릉(懿陵)은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 어씨(魚氏)의 능으로 서울 성북구 석관동1-5에 있다. 의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의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능이다. 곡장을 두른 것이 경종의 능침이며 그 아래 곡장이 없는 것이 선의왕후의 능침이다.

의릉은 성북구 석관동 천장산에 신좌인향(申坐寅向·서남에서 북동향)으로 자리하고, 홍인문(동대문)에서 10리 거리에 있다고 실록은 전한다. 이 터를 잡고 능을 조영한 이는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다. 능역의 경계는 해자(垓字·하천이나 능선을 경계로 산불 등의 방지를 위해 20여m 둘레로 잡초를 제거하고 못을 만들어 내부로 불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시설)를 원칙으로 능침에서 500보(약 590m) 떨어져 조성한다 하나, 백성의 전답과 주맥 능선의 단절을 고려해 300보 밖에 장원서(掌苑署·조선시대 원예 및 조경담당 부서)의 율원(栗園·밤나무 동산)까지로 했다. 이후 영조는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경종의 능침을 자주 찾아 정성을 다했다.

경종은 숙종 14년(1688) 10월 28일에 태어났으며, 휘(諱)는 윤이고 자는 휘서(輝瑞)다. 경종의 어머니는 역관 장경의 딸로 어린 시절 궁궐에 들어가 22세에 숙종의 승은을 입은 희빈 장씨다. 경종은 숙종이 27세, 재위 14년째에 얻은 귀한 아들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3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고.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원자로 책봉됐다가 세 살에 세자가 됐다.

그러나 경종이 정비의 소생이 아닌 것은 두고두고 당파 싸움의 원인이 됐다. 당대 서인의 최고 수장이었던 송시열은 계비인 인현왕후가 아직 젊어 왕자를 낳을 시간이 있다는 이유로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다 유배돼 사사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는 가운데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폐출시키고 왕후가 됐지만 1701년 ‘무고의 옥’ 사건으로 사약을 받았다. 세자 윤이 14세 때였다. 이후 병약한 세자는 이복동생 영조(연잉군)에게 편전에 나아가 정사를 배우는 대리청정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의 정쟁에 불을 지폈다.



경종은 1720년(숙종 46) 6월 13일 경복궁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했다. 세자 생활 29년 만이었다. 그러나 이미 조정을 장악한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자 했고, 이를 막으려는 소론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병약한 경종은 재위 4년간 당쟁에 시달리느라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1696년 세자 윤은 두 살 위인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추존 단의왕후, 1688~1718)과 결혼했다. 이때는 장씨가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뒤였고 세자도 병에 시달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세자빈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희빈 장씨와 남편을 잘 섬겼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며느리를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세자빈 심씨의 능은 혜릉(惠陵)으로 동구릉의 숭릉 옆에 있다.

생모 희빈 장씨 폐비 사건 엄청난 충격

평생 짓누른 당쟁의 파고 나약한 재위 4년 원인이었나

사각 장명등은 숙종 대에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팔각 장명등에 비해 간략하고 소박하다.

단의왕후가 승하한 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이 세자빈으로 책봉됐다. 그이가 선의왕후 어씨다.

세자빈 책봉 때 숙종이 왕세자비에게 내린 교명에는 ‘그대를 책립(冊立)해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삼는다. 그대는 상복(象服·법도에 맞게 갖춰 입는 옷, 특히 왕후의 옷)에 맞도록 처신해 부직(婦職)을 삼가며 공경으로 위를 섬기고, 은혜로 뭇 사람을 거느리고, 근면으로 뜻을 가지고, 검소로 자신을 경계할 것이며, 편안히 놀기를 즐기거나 교만하고 사치해 의리를 해롭게 하거나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고 적혀 있다. 당시 60세였던 숙종은 눈병이 심해서 며느리인 세자빈이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백내장이 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선의왕후는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됐고,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가 즉위한 1724년 왕대비로 모셔졌다. 선의왕후가 왕실에 들어온 때는 극심한 당쟁과 시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폐비 사건을 겪은 직후라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게 처신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을 때 아들을 붙들고 살려달라고 하는 과정에서 고환을 잡아당겨 성 기능을 상실해서인지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경종은 1724년 8월 25일 36세로 창경궁 별전인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해 같은 해 12월 현재의 의릉에 예장됐다. 이때 장례위원장인 총호사는 이항복의 고손이자 영의정인 이광좌(李光佐)가 맡았다. 영조의 명에 따라 경종의 제궁은 33번 옻칠을 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경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불미스러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경종의 세제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영조가 자신의 후원자인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와 손잡고, 수라에 곶감과 게장을 올려 경종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종이 승하한 지 6년 뒤인 1730년 선의왕후가 25세의 나이로 경덕궁 어조당(魚藻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의왕후의 능침은 경종과 같은 능원의 능선 아래쪽에 모셔져, 의릉은 효종의 영릉과 더불어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조영됐다. 왕비의 찬궁(빈전 안에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둔 곳)과 신위는 5칸의 가정자각을 만들어 안치했다가 3년 뒤 구정자각과 합치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도감당상과 풍수사 11명이 선정한 5곳의 후보지 즉 동구릉 내 옛 영릉 자리, 중랑포, 교하, 왕십리 등이 거론됐다. 그러나 옛 영릉 터는 천장한 장소에 다시 능을 쓰는 예가 없다며 현재의 터인 중랑포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후 인조의 장릉(長陵)은 영조에 의해 교하로 천장됐고, 영조는 정조에 의해 옛 영릉 터에 안장됐다.

의릉은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그러나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했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이 같은 구조인데,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자연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만들려는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속오례의(續五禮儀)’ 규정에 근거해 만들었는데 명릉(明陵·숙종의 무덤)의 예를 따라 규모가 작은 편이다. ‘경종실록’에 따르면 장례 때 표석(비석)을 세운 것으로 나오는데 이 표석은 장례 과정에서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신도비 형식으로 비각을 세웠으나, 세조가 능역 조영을 간소화하라고 명하면서 없어졌다가 영조 때 왕릉들을 확인하기 어렵다 해서 다시 비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영조 때 세운 최초의 비각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비각이다. 따라서 의릉의 비각은 여타의 비각보다 시기가 빠르다고 할 수 있다.

평생 짓누른 당쟁의 파고 나약한 재위 4년 원인이었나

힘없는 경종을 한탄하는 듯한 무석인의 모습.

4등신 무석인·꼬리 올린 석호 특이

평생 짓누른 당쟁의 파고 나약한 재위 4년 원인이었나

장검을 잡고 있는 무석인의 갑옷 밖으로 꼬리가 말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의릉의 능침에는 난간석을 설치하고,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12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망주석과 세호는 모두 위를 향해 기어오르게 조각했으며 전체적인 형태에서 부친 숙종 명릉의 망주석 양식을 충실히 따랐다. 사각 지붕의 장명등은 숙종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팔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문무석인은 전체적으로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가 경직된 느낌이다. 갑주(甲胄·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석인의 뒷면에는 가죽갑옷임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의릉의 석호는 꼬리를 아래로 간추리지 않고 등골을 따라 힘차게 올려놓아 긴장감을 주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힘없던 경종을 석호가 지키라는 뜻에서 석공이 용맹스러운 석호로 표현한 것 같다.

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석물들의 배치 또한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의릉의 정자각 정청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양쪽에 1칸씩 익랑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이렇게 정청을 앞면 5칸, 측면 2칸으로 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조영한 휘릉, 숭릉, 익릉, 의릉에서 볼 수 있다. 배위청은 옆면 1칸, 앞면 2칸의 건물로 일반적이다.

의릉은 1990년까지 옛 국가안전기획부가 입지해 정자각 앞과 홍전문 사이에 곡선형의 근거 없는 연못을 조성해 원형을 손상했으나, 2005년부터 문화재청이 원형을 복원해 관리하고 있다. 최근 좌청룡 능선을 허물고 웅장하게 건축이 됐던 건물은 철거하고 원형 복원을 하고 있다. 다행이다. 주변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일부 점거하고 재실터는 사유화됐으며 방지형의 연지터도 흔적이 없고, 일부 안가의 시설이 아직도 점거하고 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이들 능원의 원형 복원과 관리를 권유한다. 1970년대 철거돼 남양주시 홍유릉 능역 내 영원(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능침 앞에 이설해놓은 의릉의 재실도 원위치로 복원해야 한다. 당시의 문화재 관리 수준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다행히 국가 안보를 위해 그랬다니 위안을 삼는다.

경종은 단의왕후 심씨와 선의왕후 어씨 사이에 자식이 없다. 단의왕후의 능은 능호가 혜릉(惠陵)이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의 동구릉지구 내 숭릉과 경릉 사이 언덕에 있다.



주간동아 2010.11.15 762호 (p76~78)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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