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3

2017.04.12

북한

말레이, 김정남 시신 비밀리 평양으로 직송

北에 억류된 자국민 9명 죽인다는 협박에 총선 앞둔 라작 총리 굴복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17-04-07 19: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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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알라룸푸르의 굴복.’ 김정남 암살 사건을 둘러싼 말레이시아와 북한 간 갈등이 북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 끝이 너무 허망해 진실을 아는 나라들도 입을 다물고 있는 지경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3월 30일 쿠알라룸푸르를 떠나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자국 여객기 MH 360편에 김정남의 시신과 그동안 출국 금지를 해온 북한인 2명(현광성, 김욱일)을 실어 보내는 대신, 북한이 억류했던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가족 등 9명을 송환받았다고 발표했다.

    언론들은 이 발표를 보도했고 몇몇 언론은 기자를 동승시켜 이 여객기에 탄 북한인들을 촬영, 방송했다. 또 김정남 시신으로 추정되는, 비닐로 싼 화물을 비행기 화물칸에 싣는 장면도 내보냈다.



    북한의 일방적 승리

    이 보도를 보면서 문득 ‘마카오의 김한솔 가족은 사라졌어도 베이징에는 김정남 본처 가족이 살고 있다. 중국은 본처 가족을 활용해 김정남 시신 인도를 요구할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남을 보호해온 중국이 자국 영토로 들어온 김정남 시신을 순순히 북한으로 보내줄 리 없다는 의심이 든 것이다.



    그리하여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소식통을 두드려보니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베이징으로 간 MH 360편 화물칸에는 김정남 시신이 실려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북한 측은 베이징을 거치면 당연히 중국이 김정남 시신을 탈취할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이다. 중국은 시신을 부검해 얻은 사실을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 경우 중국이 북한을 압박할 카드를 쥐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 시신을 실은 비행기는 말레이시아 외무장관을 태운 뒤 쿠알라룸푸르에서 바로 평양으로 갔다. 북한은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그 시신이 김정남인지 확인한 뒤에야 외교관과 가족 9명을 풀어줬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그 비행기로 9명을 싣고 돌아와, 이 비행기가 김정남 시신을 싣고 간 사실은 비밀에 부치고 9명을 싣고 돌아온 것만 발표했다.

    소식통들은 “김정은은 김정남은 물론, 김정남을 보호해온 중국에게도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베이징을 경유해 김정남 시신을 받는 것은 북한 처지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상상도 못 할 북한의 압박’을 받았기에 시신을 직접 북한으로 보냈는데, 이것이 너무 굴욕적이라 베이징을 거쳐 보낸 것처럼 꾸몄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수사를 통해 김정남을 암살한 것이 북한 공작조직으로 판단되자, 북한인에 대한 ‘무(無)비자 제도’를 폐지하고 주북한 자국 대사를 소환했으며,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를 추방했다. 북한은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가족 등 11명을 출국 금지시키고 인질로 잡았다. 그러자 말레이시아도 주말레이시아 북한 외교관과 노동자 1000여 명의 출국을 금지시켰다.

    말레이시아는 협상을 통해 출국 금지자들을 맞교환한 후 북한과 외교를 단절하려 했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과 마찰을 피하고 말레이시아만 물고 늘어지려고 작심한 듯, 유엔 직원으로 와 있던 말레이시아인 2명을 석방하고 9명만 잡아놓았다.

    김정남은 ‘김철’이라는 이름의 북한 외교관 여권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김철의 부인이라며 리명희라는 인물을 내세워 말레이시아 정부를 압박했다.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를 지낸 리동일에 이어 외무성 부상인 최희철도 투입해 “리명희가 요구하니 김철 시신을 돌려보내줘야 한다. 김철은 자연사한 것이니 양국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말레이시아가 철회한 무비자 제도와 양국 외교관계도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면 9명을 차례로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9명 중 4명이 어린이라 말레이시아 정부는 당황했다.



    시신, 베이징 거쳐 보낸 것처럼 꾸며

    북한은 리명희의 신원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리명희가 부인이라면 자식을 낳았을 테니, 말레이시아는 ‘김정남과 비교해보게 그 자녀의 DNA를 달라’고 할 수 있었는데도 9명 처형 협박에 놀라 아무런 요청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외교관과 그 가족은 1961년 채택된 ‘외교관계에 관한 빈협약’(빈협약)에 따라 주재국으로부터 무조건 보호받아야 한다. 한국은 당연히 이 조약에 가입했고 북한도 1980년 가입했다. 그런데도 북한은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그 자녀들도 살해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협박이 100억 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를 흔들었다고 한다. 위기에 빠진 라작 총리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조만간 총선을 치르려 하는데, 평양에서 외교관들이 살해되면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된다 보고, 북한 측 요구를 들어줬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러한 라작 총리를 끝까지 흔들었다. 라작 총리는 베이징으로 가는 여객기로 김정남 시신을 보내주라고 지시했지만, 북한이 베이징을 거치면 안 된다고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는 자국 예산을 들여 글로벌 익스프레스로부터 비즈니스 제트기인 BD-700을 빌려 외무장관으로 하여금 김정남 시신을 싣고 가게 했다. 이 제트기는 한 번 급유로 평양까지 왕복하지 못한다. 말레이시아는 북한 측에 연료를 보급해달라고 했으나, 북한은 그마저도 거부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서울에 들러 연료를 보급받겠다”고 했지만 북한은 “서울은 물론 베이징, 상하이, 도쿄, 타이베이 등엔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북한 측은 한중일과 대만은 김정남 암살 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적대적일 수 있다 보고 아예 차단해버린 것. 결국 이 제트기는 필리핀 마닐라에 들러 급유를 받고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왔다. 

    이러한 사실이 은밀히 알려지면서 세계 외교계는 북한의 행태에 대해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소식통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이 하지 않으면 미국이 북한을 직접 다루겠다고 한 것과, 미국 하원이 북한을 대(對)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하는 법안을 가결한 일은 이 사건을 보고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 소식통은 “지난해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 우리 근로자들이 인질로 잡혔을 수도 있다. 그만큼 김정은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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