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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21세기 환향녀’를 만드는 어리석음

쫓겨난 외국인 아내들 고국서 푸대접 … 타민족에 대한 이해와 포용 아쉬워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21세기 환향녀’를 만드는 어리석음

‘21세기 환향녀’를 만드는 어리석음

지난해 5월 서울에서 열린 ‘결혼이민자 부부 합동결혼식’ . 이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임진왜란 이후 만주족이 급속히 성장해 후금(後金)을 세우자 조선은 명(明)과 후금의 중간에 서게 됐다.

당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적 식견으로 기미자강(羈自强·한편으론 다독거리면서 한편에선 힘을 길러 대비함)의 중립외교를 구사해 임란 후의 난국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러한 현실적 정책은 서인정권이 내세운 ‘부모의 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와 통한다’는 명분론과 살제폐모(殺弟廢母)의 패륜행위에 대한 비판에 밀려 좌초하고 말았다.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해 후금을 자극, 이 땅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인조 5년(1627) 1월 후금의 아민(阿敏)이 3만 병력으로 황해도 황주까지 침입하자 조선 정부는 형제관계를 강화하고 후금 편에 설 것을 약속했다. 그 후 후금은 내몽골을 평정하고 국력을 배양해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조선에 더욱 철저한 순복(順服)을 강요했다. 즉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의 수립을 요청하며 정명(征明)에 필요한 군량미와 병선을 요구했다.

이에 인조는 격노했고 조정에서는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의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조선은 주전론을 채택했고 그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명분만 내세워 또다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려는 서인의 생리와 논리는 실로 어이없는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강화도 피란 부녀자, 유성처럼 절벽에서 몸 날려

인조 14년(1636) 12월 청 태종은 압록강이 얼어붙자 의주(義州)를 피해 창성(昌城)에서 몰래 도강(渡江)했으며 12만의 기병은 쏜살같이 샛길로 달려 봉화도 오르기 전 3일 만에 선봉이 홍제원(弘濟院)을 점거했다. 급보를 접한 조선 정부는 종묘 신위와 왕비·왕자와 부녀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인조도 강화로 이어(移御)하려 했으나 이미 길이 막혔다. 당황한 왕 일행은 방향을 남으로 돌려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니, 때는 인조 15년(1637) 정초였다.

성에는 식량과 무기가 어느 정도 있었고 군사도 1만4000여 명 있었으나 청군은 본거지를 떠난 지 불과 5, 6일 만에 남한산성을 포위해버렸다. 호란에서는 왜란과 달리 격전이 없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고 청군의 일방적인 공격만 있었을 뿐이다. 사실 싸움은 성 안에서 벌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경파로 전쟁을 계속하자는 척화파와 소수의 현실파로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 사이에 설전이 난무했다. 대다수는 척화파였고, 주화파는 소수였다.

결국 인조는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림)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처럼 지도층의 분열이 한창일 때 강화도 상황은 어떠했는가. 강화 대안까지 진격한 청장 용골대(龍骨大)가 문수산성에 올라 굽어보니 의외로 조선의 수비가 소홀했다. 그는 근처의 집을 모두 헐어 기둥이며 문짝으로 뗏목을 만들어 타고 홍이포(紅夷砲)를 쏘며 도강했다.

요란한 홍이포 소리에 놀란 강화 수비군은 이렇다 할 반격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수비사령관 김경징(金慶徵)은 피란 온 수많은 부녀자를 뒤로한 채 도망쳤다. 이리하여 강화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요란한 포성,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초연, 청군의 함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청군의 무자비한 겁탈에 맞서 강화에 온 많은 양반 부녀자가 소도(小刀)로 자결했으며, 또 많은 부녀자가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강화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21세기 환향녀’를 만드는 어리석음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병인양요(1866) 등 외침이 있을 때마다 적을 방비하는 요새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온 김포 문수산성의 성벽. 하얀 부분은 최근 정비사업으로 새로 축조된 것이다.

승천포(昇天浦)를 바라보는 절벽 위에서 흰옷 입은 여인들이 유성처럼 몸을 날렸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많은 여성이 청군의 포로가 돼 이역만리 만주땅으로 끌려간 것이다.

특히 청군이 장기간 주둔한 남한산성 주변과 강화도, 인근 경기 지역에서는 도성에서 피란 온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포로가 된 수많은 여성 중에는 청인의 유협(誘脅)을 물리치고 단식해 죽거나 칼로 자결하는 일도 많았지만, 전란 중에 고백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여자도 상당히 많았다.

그 후 전란이 수습되자 조선인 포로 쇄환문제가 대두돼 많은 속가(贖價)를 주고 포로를 석방케 하는 일이 진행됐다. 이국땅에서 온갖 수난을 당한 부녀자들이 친정 부모나 남편, 자식들의 노력으로 풀려나 오랜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국은 죄 없는 그녀들을 죄인 취급했다. ‘실절(失節)한 부녀로 간주된 그녀들은 죄인이므로 다시는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다. 그러니 이혼시켜버려야 한다’는 비정에 직면했다. 이처럼 포로가 됐다가 송환된 환향녀(還鄕女) 처리문제는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절을 잃은 부녀자들이 송환되자 국왕에게 실절한 아내와의 이혼을 청원하는 사대부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다.

인조, 환향녀 논란에 “인도적 차원에서 버리지 말라”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고사본말 중 ‘순절부인(殉節婦人)’편은 이렇게 전한다. “윤선거(尹宣擧·1610∼1669)의 아내 이씨는 강화 갑곶의 수비가 무너진 것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 조정에서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표창했다. (중략) 임진왜란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적진에 잡혀갔다가 살아온 자를 시집에서 이혼하고 개취(改娶)할 것을 청해 조정에서는 의논이 많았다. 선조가 이르기를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니 버릴 수 없다’ 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청나라로부터 속환된 자에 대해 조정에서 다시 장가드는 것은 허락하고, 인연을 끊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선조(先朝)의 정한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했다.”

이처럼 국왕이 실절이 불가피했음을 들어 인도적 차원에서 버리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유교적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수많은 환향녀는 행실이 난잡한 ‘화냥년’이 돼 가문에서 축출당하고 말았다. 자신들의 지고지순한 의리 명분 때문에 무고한 부녀자들에게 참혹한 수난을 안기고, 종국엔 그 가련한 희생자들을 또다시 실행(失行)으로 몰아 압살하는 이 모순을 과연 사대부의 명분이라 해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내가 자결할 때 평민 복장으로 탈출한 윤선거는 강화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관직 진출을 거절했다고 하니, 그나마 예학에 밝은 그가 선비의 삶을 견지했다고 보겠다. 최근 농촌 총각의 국제결혼 급증으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한민족의 세계화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문화 차이와 경제 문제로 가정불화가 일어나 한국 남편이 동남아 출신의 아내를 내쫓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버림받은 외국인 아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불행을 겪고 있는데, 이유인즉 고향으로 돌아가면 ‘화냥년’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의 뼈아픈 역사를 체험한 민족의 후손인 우리가 또 다른 역사 속의 환향녀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내년에 G20 정상회의를 개최할 만큼 성장해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는 한민족에게 타민족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이 아쉽다.



주간동아 2009.10.20 707호 (p76~77)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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