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0

2009.06.16

지친 도시인 삶에 건네는 소주 한 잔

‘도시심리학’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9-06-11 14: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지친 도시인 삶에 건네는 소주 한 잔

    하지현 지음/ 해냄 펴냄/ 240쪽/ 1만2000원

    모든 상품의 기획은 언제나 인간 삶의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恒常性)에서 출발한다. 갈증이 나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물을 주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갈증은 달리 말하면 ‘결핍’이다. 결핍은 ‘불안’을 초래한다. 인간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결핍을 메우려는 본능이 있다. 불안을 해소해주는 상품이 필요한 것이다. 능력 있는 기획자는 없는 결핍도 만들어내고 그 결핍에 적절한 상품을 제공하는 사람일 것이다.

    1990년대 ‘개인’이란 상품이 뜨면서 남녀 관계는 크게 흔들렸다. ‘쿨(cool)’이 삶의 신조로 변하면서 남녀의 잦은 이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많은 개인에게는 심각한 결핍을 불러왔으며, 그런 결핍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본능을 자극했다. 그래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남녀를 대척점에 놓고 설명하는 책이 상한가를 친 이후 심리학은 급격하게 세를 넓혀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미래가 불안해지면서 이제 심리학 서적은 ‘만병통치약’처럼 행세한다. 원래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하는 기반학문의 한 종파였지만 지금은 처세서나 자기계발서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지난해부터는 우울증이나 슬픔, 고통, 외로움 등을 이겨내는 매뉴얼을 제시, 자아치유나 위로를 돕는 소프트한 심리학 서적이 큰 흐름을 이뤘다. 역사학이 조선이라는 과거로 도피해버린 사이에 심리학은 현실을 독파하는 인문학 대표주자가 되었다.

    ‘도시심리학’도 제목만 보면 그런 흐름을 추종한 평범한 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문자 메시지, 폭탄주, 다문화가정, 광적인 종교, 조기영어 열풍, 자판기 커피, 성형, 와인, 자살, 사주카페, 쇼핑 중독, 고시 열풍, 24시간 연중무휴, 대리운전, 섹스 중독, 노래방, 기러기 아빠 등의 22개 주제를 다룬 첫 장만 읽어봐도 ‘어! 이 책은 좀 다르네’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이 책은 긍정적으로 사고하라거나 세상일은 마음먹기 달렸다거나 하는 도식적인 매뉴얼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 임상실험의 대상이 된 인물들의 사례를 들며 때로는 생각이 다른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천편일률적인 처방전을 내놓지도 않는다.

    이 책에는 평범한 도시인의 일상을 엿보는 저자만의 독특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커튼 뒤에 숨거나 취조실 유리창 너머에서 살펴보는 관조자는 아니다. 모든 글이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만큼 저자 자신이 도시인의 중심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니, 저자가 바로 임상심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글의 콘셉트는 명확하고 세상 변화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의 보편적 감성을 울리기에 충분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은 기존 관념을 뛰어넘는 역발상이 넘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A는 B라거나 A는 B, C, D라는 식의 단순한 해석을 내놓지는 않는다. 저자는 모든 키워드를 다층적 앵글로 바라보고 그 키워드가 지닌 복합적인 의미를 명쾌하게 해석해낸다. 폭탄주를 관계의 경직을 해결하는 효과적인 촉매이자 촉진제로 보고, 투명한 평등주의적 자세를 집단의 힘으로 강제하는 것, 친해야 하는 사명감과 친하고 싶지 않은 개인 욕구 사이의 딜레마를 고비용으로 해결해주는 솔로몬의 지혜로 정의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촌철살인의 표현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든다.

    분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섭받지 않고 혼자서 정신적 휴식을 취하고 싶은 개인의 욕구가 늘어나면서 바가 새로운 혼자 놀기의 공간으로 자리잡아가는 풍경이나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서 곰장어에 곁들이는 소주 한 잔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빗소리는 수천만원짜리 오디오보다 멋진 생음악이라거나 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희로애락의 동반자라는 마지막 설명까지 듣다 보면 폭탄주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안까지 알려주는 듯해서 편안함을 느낀다.

    ‘중세의 촌락’ 같은 마을 공동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미래가 불안하다. 특히 직장이나 자기 일을 갖지 못한 20대는 인생 역전 한 방을 위해 고시에 몰두한다. 합격할 확률이 낮은데도 왜 그렇게 몰두할까. 저자는 배운 것이 시험뿐인 사람들이 시험만큼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기에 벌이는 ‘범생이들의 합법적인 의자 뺏기 게임’이라고 정의 내린다. 시험에 자꾸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1%의 성공신화만 보기 때문이란다.

    저자가 자신의 모습을 까발렸듯 독자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알몸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자신의 정서적 허기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 다음에 결핍을 채우려는 본능이 작동할 것은 당연한 절차. 이제 독자는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될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