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0

2009.06.16

‘야구천재’ 이종범, 마흔 잔치 시작했다 

타격 폼 고치고 놀라운 부활 … 통산 500도루, 1000득점 대기록도 눈앞

  • 윤승옥 스포츠서울 야구담당 기자 touch@sportsseoul.com

    입력2009-06-11 13: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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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천재’ 이종범, 마흔 잔치 시작했다 

    ‘야구천재’ 이종범. 불혹에 그는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천재’라는 타이틀을 잊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프로야구 KIA 관계자들에게 이종범(39)의 부활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면 5월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5월13일 대전에서 한화와 맞붙었을 때의 일이다. KIA는 1, 2회에 8점 정도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절반인 4점을 내는 데 그쳤고, 선발투수 곽정철은 4점 리드에 긴장이 풀려 느슨하게 던지다 위기에 봉착했다. 일방적인 승리가 가능한 경기였음에도 5회에만 4점을 내주면서 9대 7까지 쫓겨 오금 저리는 상황을 맞았다. 5회를 마치고 클리닝 타임 때 이종범은 코치의 양해를 구한 뒤, 후배들을 모아놓고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한마디 던졌다.

    “느그들 오늘 지면 디져분다.”

    지면 죽는다는 최고참의 말에 KIA 선수들은 집중력을 재정비해 실점을 막았고, 결국 10대 8로 승리했다. 이날 여세를 몰아 KIA는 3연승을 탔다. 이종범의 힘이었다.

    KIA의 모 코치는 “올해 우리 팀은 이종범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솔직히 기대 못했던 부분”이라며 “이종범은 그라운드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로 팬들을 흔들어놓고, 팬들의 시선과 떨어진 더그아웃에서는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그의 존재감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이는 불과 몇 달 만에 반전된 상황이다. 이종범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 구단 측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은퇴를 종용받았다. 구단은 “이종범을 내보내야 팀이 산다”고 외쳤고, 이종범은 “아직 후배들과 경쟁할 힘이 남아 있다”고 버텼다. 결국 이종범이 이겼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종범이 악수(惡手)를 뒀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의 부활은 요원해 보였다.



    “앞으로 3~4년은 끄떡없겠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딴판이었다.‘바람의 아들’ ‘야구천재’로 불리며 1990년대 한국 야구를 주름잡던 시절의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특유의 휘모리 장단을 가동해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그의 눈빛이 살아나면서 KIA는 현재 3위로 올라섰고, 600만 관중을 바라보는 프로야구도 신바람을 내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 “앞으로 3~4년은 끄떡없겠다”고들 말한다.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 무엇이 그를 살아나게 했을까.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되는데, 먼저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아집에서 벗어나 팀을 끌어안았다는 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이에 맞게 타격 폼을 고치고 자신만 챙기던 천재에서 벗어나 팀을 이끄는 맏형이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타격 폼을 수정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종범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7년 타율 0.174로 죽을 쑬 때도 호쾌한 자기 폼을 고집하던 그였다. “주위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자기중심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맞는 말이지만,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 올해 배수의 진을 치더니 미련 없이 타격 폼을 수정했다. 여느 노장 타자들이 그렇듯 보폭을 줄였다. 타격 자세 때 양다리의 간격(스탠스)과 공을 칠 때 다리를 내딛는 길이(스트라이드)를 줄여 빠른 공에 쉽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한 것. KIA 황병일 타격코치는 “전지훈련 때 20cm 정도 줄였다”고 전했다.

    타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특히 빠른 직구에 배트가 밀린다. 신경과 근육의 공조가 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경은 젊을 때의 상황을 기억해 전과 같은 명령을 근육에 전달하지만, 근육이 이를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몸이 늙다 보니 순발력을 회복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 보폭을 줄임으로써 배트가 돌아 공을 치기까지의 거리를 짧게 한다.

    이종범은 6월3일까지 현재 47개의 안타를 쳤는데 좌익수 쪽이 16개, 중견수 쪽이 7개, 우익수 쪽이 13개다. 좌중 5개, 우중 3개, 나머지는 내야 안타다. 스프레이 히트, 즉 전방위로 타구를 날리는 부챗살 타격을 한 것이다. 보폭을 줄이면서 몸 쪽과 바깥쪽의 빠른 공을 간결하게 손목 힘을 이용해 쳐낼 수 있게 된 덕이다.

    타격 폼 수정과 함께 팀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도 올해 상승세의 큰 밑천이다. 과거 이종범은 자신만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칭스태프는 그에게 팀의 리더 노릇을 주문했지만,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자 팀이 몰락했고, 자신도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올해 이종범은 팀에 녹아들어 있다. 후배들 앞에서 솔선수범하고,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KIA의 또 다른 코치는 “올 초 이종범에게 다시 리더 노릇을 요청했더니 전과 달리 흔쾌히 받아들였다”면서 “올해는 더그아웃이 무척 시끄럽다. 이종범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갓 입단한 신인 안치홍 등 어린 후배들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고, 더러 혼을 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프로 세계에서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팀 최고참이라도 자신의 노하우를 쉽게 전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KIA의 사실상 플레잉 코치 역할

    KIA 조범현 감독은 이에 대해 “이종범이 사실상 플레잉 코치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우리 팀에서 가장 집중력이 높다. 야구도 가장 진지하게 한다. 후배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입단한 후배 나지완은 “그의 열정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팀의 화학적 결합을 중요시하고 사소한 단서로도 그것을 파악해내는 SK 김성근 감독은 “이종범이 팀에 들어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의 성적으로만 보면 이종범은 팀 내에서 중위권 수준이지만, 코치들은 그를 최고로 친다. 어느 종목이나 그렇듯 야구도 단순 타격 수치로만 기여도를 평가할 수는 없다. 모 코치는 “번트, 주루, 진루타 등 팀 공헌도에서 그를 따라올 선수가 없다”고 말한다.

    얼마 전 2500루타 기록을 달성한 이종범은 500도루(통산 두 번째), 1000득점(최소 경기) 등 굵직한 기록 달성을 노리고 있다. 두 분야 모두 한 개씩 남아 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말한다.

    “기록은 잘하다 보면 달성된다. 중요한 것은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다. 우리 팬들에게 올해 ‘가을 야구’를 분명히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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