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0

2009.06.16

부활하는 ‘왕의 남자’

흔들리는 여권 이재오계 약진 … 조기 전당대회는 ‘이재오 대표’ 만들기?

  •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입력2009-06-11 11:1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부활하는 ‘왕의 남자’

    5월21일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당선된 안상수 의원(오른쪽)과 러닝메이트로 나온 김성조 신임 정책위의장은 이재오계로 분류된다.

    “1차 투표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그제부터 ‘보이는 손’이 움직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오더를 내리는 ‘보이는 손’은 잠시 외면하고 심사숙고해달라.”

    5월21일 실시된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 황우여 원내대표 후보와 짝을 이뤄 정책위의장 후보로 나선 친박(親朴)계 최경환 의원이 2차 투표를 앞두고 의원들에게 호소한 말이다. ‘보이는 손’은 앞서 김성조 정책위의장 후보와 러닝메이트로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안상수 의원이 황우여-최경환 조의 갑작스런 등장에 대해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한 것을 빗댄 말이다. 최 의원이 언급한 ‘보이는 손’은 이재오 전 최고위원, 안 의원이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은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결과는 ‘보이는 손’의 낙승이었다. 안-김 조는 2차 결선 투표에서 출석의원 159명 중 95표를 획득해 62표를 얻는 데 그친 황-최 조를 물리쳤다. 이번 한나라당의 원내대표 경선 결과는 친이(親李)계 내부의 권력 축이 ‘SD(이상득)계’에서 ‘이재오계’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됐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의원의 설명이다.

    ‘보이는 손’이 黨 접수

    “원내대표 경선 직전까지 황우여-최경환 조가 대세를 이뤘다. SD와 박근혜 전 대표의 의중이 함께 실린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을 방문 중이던 SD가 경선 사흘 전인 18일 귀국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 측과 그의 지원을 받는 안 후보 측이 SD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퇴진운동을 벌이겠다’며 몰아붙였고, 이에 SD가 당초 황-최 조를 밀라고 지시했던 친이계 의원들에게 ‘회군’명령을 내린 것으로 안다.”



    황-최 측도 같은 맥락의 말을 했다.

    “당초 우리 표가 절반이 넘는 80표 이상일 것으로 확신했다. 잘하면 1차 투표에서 결판이 날 정도의 지지세였다. 그런데 이상득 전 부의장이 귀국한 뒤 불과 이틀 사이에 40표가 빠져나가더라. ‘뻔히 보이는 손’이 작용한 게 틀림없다.”

    실제로 황-최 조는 1차 투표에서 47표를 얻는 데 그쳤다. 어쨌든 이때부터 이 전 최고위원 세력이 SD계를 밀어내고 당을 접수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났다. 한 중진 의원은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전 최고위원에게 밀리기 시작한 SD가 이어진 당직개편에서도 힘을 쓰지 못했고,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조문 정국까지 겹쳐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다”고 말했다.

    이 전 부의장은 당직개편 때 친박계 인사를 사무총장에 앉히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내대표에 친이계 진영인 안 의원이 당선됐으니 사무총장은 친박계 인사가 맡아야 당이 화합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총장에는 친이계 중에서도 이재오계로 꼽히는 장광근 의원이 발탁됐다. 또 김성조 의원이 정책위의장에 당선되면서 자리를 내놓은 여의도연구소장에도 이재오계의 핵심인 진수희 의원이 기용됐다. 이로써 이재오계는 원내사령탑, 당의 조직과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 전략과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 등 핵심 보직을 꿰찼다.

    이재오계의 득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이 전 부의장의 ‘2선 퇴진’ 선언이다. 이 전 부의장은 당 쇄신책을 놓고 격론이 벌어진 6월4일 연찬회 하루 전에 열린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당, 정부,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엄격히 처신하겠다”고 선언했다.

    ‘만사형(兄)통’이란 말까지 낳았던 이 전 부의장의 빈자리를 이재오계가 빠르게 메워가는 상황에서, 이 전 부의장 2선 퇴진 선언과 관련해 ‘이재오 배후론’까지 등장했다. 이 전 최고위원이 측근들을 전면에 내세워 ‘지도부 총사퇴론’을 제기하면서 인적 쇄신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 부의장이 지도부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당무에 간여해온 만큼 인적 쇄신 대상에 이 전 부의장을 포함시켰다는 것.

    이상득 2선 퇴진 ‘이재오 배후론’ 등장

    실제로 6월2일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권택기 김용태 임해규 정태근 조문환 차명진 의원 등 초·재선 의원 6명은 모두 이 전 최고위원의 인맥으로 분류된다. 흥미로운 것은 지도부 사퇴 기자회견이 있던 날, 이 전 최고위원이 자신의 인터넷 포털사이트 블로그에 미국 유학생활기를 연재하면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다는 점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 글에서 “선거에 패한 자들은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재오였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8대 총선 직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실정치를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된 데 대한 억울함의 표시였다. 이 전 최고위원이 출국할 당시 외압이 있었고, 그가 귀국을 시도할 때도 이 전 부의장 측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소문이 여의도 정가에 파다했다.

    물론 이 전 최고위원 측에선 ‘이재오 배후론’을 “소설 같은 얘기”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그의 측근은 “황당한 얘기”라면서 “당분간 중앙대 객원교수로서 대학 강의에 전념하겠다는 이 전 최고위원의 기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내대표 경선→조문 정국→당직개편을 거치면서 친이계 내부의 권력 축이 요동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당내 쇄신특위와 소장파가 요구하는 인적 쇄신론과 맞물리면서 이재오계는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나아가 10월 재·보궐선거를 통해 이 전 최고위원이 여의도에 재입성할 경우 이재오계는 여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소장파들이 박희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퇴진과 조기 전당대회를 요구하는 것은 결국 ‘이재오 대표’ 만들기를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내다봤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