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김민경 기자의 It-Week | 서른두 번째 쇼핑

싸구려 커피와 인터넷 쇼핑

  • 김민경 holden@donga.com

싸구려 커피와 인터넷 쇼핑

뚱뚱한 구형 모니터도 뚫을 듯한 강렬한 눈빛, 옆 사람이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의식하지 못하는 놀라운 집중력, 갈증도 배고픔도 요의도 잊은 듯한 무아지경의 표정. 이렇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유달리 진지하게 앉아 있는 직원이 있다면 인터넷으로 쇼핑 중일 겁니다. 틀림없어요. 누가 그에게 돌, 아니 스테이플러를 던질 수 있을까요. 아침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똑같은 일을 변함없는 정신상태로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사실 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이 다른 사람이 뭔가 끝내서 넘겨주기를 하릴없이 기다리느라, 혹은 하루 종일 신문 보다가 퇴근하면서 대단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있어 야근을 하진 않나요? 부장님이 서류를 검토해서 오후 늦게나 줄 테니 오늘은 저녁때 나와야겠어, 라고 쿨하게 말하는 신입사원은 드물잖아요. 최근엔 해외 본사와 ‘화상회의’를 하느라 늦은 밤까지 회사에서 대기해야 한다며 ‘글로벌’ 회사가 ‘서양 애들’ 근무시간에만 맞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많더군요.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의 영예를 지켜갑니다.

이유와 성별이 어떻든, 회사에서 긴 밤 보내는 데 인터넷 쇼핑만한 것이 없죠. 덕분에 인터넷 쇼핑몰은 심야에 인파로 북적댑니다. 새벽까지 깨어 있어야 했던 지난 몇 주의 야근 동안 저도 인터넷 쇼핑몰을 빙빙 돌았죠. 쇼핑은 미지근한 커피보다 더 강력한 각성 효과를 보이니까요. 자고로 쇼핑이란 묵직한 매장 문의 무게를 느낀 뒤―연약함을 과장함으로써 당황스러워하는 꽃미남 도어맨의 미소를 받는 순간―바닥이 하얀 대리석인지 줄무늬 타일인지 감상하며 또각또각 걸어들어가, 조명과 상품의 디스플레이에 몇 점을 줄지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평소 주장에서 완전히 벗어난 행동이긴 했어요. 윈도쇼핑도 부담스런 불경기에 시간과 수면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쳐 인터넷 쇼핑몰과 실재를 구분할 수 없었던 거죠. 현실과 사이버공간의 경계가 사라질 것이라는 미래학자의 예언은 은유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면 클릭 한 번으로 제가 구입한 상품을 볼까요. 만병통치약급의 복합비타민 한 병. 이렇게 많은 비타민과 무기질이 매일 필요한지 조사 중입니다. 인기 일본만화 ‘은혼’ 캐릭터가 아침잠을 시원하게 깨워줄 것 같아 주문한 자명종. 화면상 우람했던 이 시계는 손목시계보다 더 작고 알람 소리도 가냘프네요. ‘할리우드 스타의 비밀’이라는 카피에 낚여 산 속옷 세트는 그럭저럭 입을 만한데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요. 복고풍의 빨간색 지갑은 재고물량이 없다며 거래를 취소한다는 싸늘한 문자메시지로 돌아왔습니다. 왜 검은색 지갑을 권해주지 않나요? 또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들이 자꾸만 없어져 불만 e메일도 한 통 보냈더니 컴퓨터에 뭔가를 새로 깔라는 답을 받았습니다. 왠지 잘하지 못한 쇼핑의 기록 같아요.

보도에 따르면 요즘은 인터넷 쇼핑몰도 단골고객만을 우대한다고 합니다. 다양한 고객이 돈을 벌게 해준다는 ‘롱테일의 법칙’이 여기서도 깨졌다고 해요. 저처럼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를 사면 푸대접을 각오하라는 거죠.

싸구려 커피와 인터넷 쇼핑

야근할 때 커피와 인터넷 쇼핑만한 동료도 없죠. 그런데 배송 박스에 구입 물건을 구체적으로 써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자 동료가 “어이, 여기 줄무늬 빤스 배달 왔어요!”라고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대부분 상품이 오프라인보다 싸고, 영수증 갖고 나올 자신 없으면 차 빼라는 주차요원과 마주칠 일도 없고, 카운터 뒤에 서서 상전처럼 아래위를 훑는 매장 직원과 기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다는 점은 인터넷 쇼핑의 장점입니다. 또 한 가지. 인터넷 쇼핑의 가장 은밀하고 흐뭇한 매력은 내가 산 물건인데도 배송받을 땐 꼭 선물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아닐까요? 심지어 박스 대신 물방울무늬 선물 포장지를 선택할까 망설인 적도 있으니까요. 모니터상의 이미지만 보고 구입하니까, 한껏 기대하며 택배 상자를 풀어 실물을 보는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요. 어쩐지 야근한 나를 위해 또 다른 내가 주는 선물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선물할 일이 많은 5월입니다. 인터넷 쇼핑몰은 의무방어용 선물 증여에 최적의 환경을 구현하죠. 5월 배송일에 맞춰 오늘 야근 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인터넷 쇼핑을 해볼까 해요.



주간동아 2009.05.12 685호 (p75~75)

김민경 holden@donga.com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8

제 1218호

2019.12.13

“긴 터널 빠져나오자 우울의 고장”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