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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가슴속 어떤 정자에서 갈매기와 벗 삼을 것인가

청백리 황희의 반구정 vs 권모술수 한명회의 압구정, 삶만큼 극명한 대조

  •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가슴속 어떤 정자에서 갈매기와 벗 삼을 것인가

가슴속 어떤 정자에서 갈매기와 벗 삼을 것인가

조선조를 대표하는 영의정 황희. 조선시대 500여 년을 지탱한 선비의 청렴 강직과 여유를 현대 지식인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왼쪽). 오른쪽은 반구정.조선조를 대표하는 영의정 황희. 조선시대 500여 년을 지탱한 선비의 청렴 강직과 여유를 현대 지식인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왼쪽). 오른쪽은 반구정.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의 반구정(伴鷗亭)과 서울 강남 한강변의 압구정(狎鷗亭)은 각각 조선시대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1363~1452)와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퇴은(退隱) 후 세상의 치란성쇠(治亂盛衰)를 잊고 갈매기와 허물없이 짝을 지어 즐기고자 지은 ‘강정(江亭)’이다. 현재 압구정은 불타버려 압구정동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 있지만 반구정은 자유로를 타고 가다 연천으로 빠지는 문산읍 사목리에 황희 정승 유적지로 고즈넉하게 남아 있다.

황희와 한명회. 반세기의 격차를 두고 태어난 두 정승의 삶은 드라마틱하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황희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명망 높은 청백리 재상으로, 한명회는 권모술수의 대가로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이들의 삶을 통해 금권(金權)과 연루돼 비리가 난무하는 저간의 세상에 대한 교훈과 처세를 반추해보자.

67세 황희, 파직되자 반구정 지어 청백리 생활

황희는 고려조 거인(擧人)으로 허조(許稠·1369~1439)와 더불어 조선조에 입각한 대표적 인물이나, 본래 고려가 망하자 역성혁명에 반발해 조선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유신(遺臣)이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라는 연유로 두문동 선배들의 강권을 받아 2년 후 하산해 태종·세종대에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의 환로(宦路)를 거치며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높은 학덕과 청렴으로 조선 명재상의 사표가 됐다. 반구정은 황희가 67세 되던 해 국마(國馬) 100여 필이 죽는 사건이 발발해 당사자인 태석균(太石鈞)이 사헌부에 구금되자 “가볍게 다스려달라”고 건의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일시 파직돼 교하에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다.

황희는 정치(精緻)하면서도 소탈한 성품 덕에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특히 ‘언언시시(言言是是)’가 유명하다. 어느 날 적각(赤脚·여자 종) 간에 언쟁이 벌어졌는데 마침 황희가 옆을 지나게 됐다. 그러자 한 적각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시비를 가려달라고 했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동정하듯 “너의 이야기가 옳다”라고 수긍했다. 그러자 또 다른 적각이 분하다는 듯이 자신의 주장을 말했다. 황희는 이 역시 다 듣고는 “네가 말하는 것도 옳다”라고 달랬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황희의 부인이 “당신은 싸움을 말리는 거요, 부채질하는 거요? 사물에는 일시일비(一是一非)가 있지 않아요. 당신 말대로 두 사람이 모두 옳다면 싸움을 하겠어요?”라고 나무라자 황희는 “당신의 말도 옳은 말이야”라고 해 싸움판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어느 해 중국에서 구슬에 구멍을 뚫은 진품(珍品)을 조정에 보내왔는데, 중국 사신이 “중국에는 이 구슬 구멍에 실을 꿰어 반대쪽 구멍으로 내보내는 사람이 있는데 귀국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황희가 그 구슬을 들고 구멍을 들여다보니 곧게 뚫리지 않고 구불구불해 반대쪽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 실오라기가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람을 시켜 개미 한 마리와 꿀 한 종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 사신에게 “어린애 장난 같은 놀이군요”라고 한 뒤 개미 허리에 실을 잡아매 한쪽 구멍으로 집어넣은 다음 반대쪽 구멍에 꿀을 살짝 발라놓으니까 개미가 꿀 냄새를 맡고 기어나왔다. 황희의 놀라운 기지에 조정은 감탄했다.

이렇듯 일국의 재상으로 명망이 높았지만 황희는 청빈한 삶을 살아 그의 장례 때 딸들이 상복이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입었다고 하니, 그의 청렴결백은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귀영화 한명회, 용봉차일 설치 시도 ‘임금 행세’

한명회는 양반가의 혈통이나 칠삭둥이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고 유리걸식하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평생지기이자 동지였던 권람(權擥·1416~1465)이다. 한명회와 권람은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눴는데, 서로 맹세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훈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 권람은 늦깎이로 출사해 권람은 35세에 향시와 회시에서 모두 장원 급제했고 전시에서 4등이 됐으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삼장장원(三場壯元)이 됐다. 한명회는 권람의 덕으로 황희가 사망한 이듬해인 1453년 38세에 개성 경덕궁직(敬德宮職)에 임명돼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가슴속 어떤 정자에서 갈매기와 벗 삼을 것인가

겸재 정선이 1741년 잠실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그린 압구정 풍경. 이곳에는 1975년부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림 속 정자는 지금의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쪽에 해당한다.

그 후 한명회는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을 만나 계유정난 때 수양의 심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연이어 수양이 세조(재위 1455~1468)로 즉위하면서 좌익공신 1등에 책록돼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이런 한명회를 세조는 ‘나의 장량(張良)’이라고 총애했다. 51세에 영의정이 되고 세조 훙거(薨去)후 신숙주(申叔舟·1417~1475), 구치관(具致寬·1406~ 1470) 등과 승정원을 주재하는 원상(院相)이 되어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한명회는 당대 실세인 권람, 신숙주와 인척관계를 맺고, 두 딸을 예종비인 장순왕후, 성종비인 공혜왕후로 만들어 부원군이 됐다. 이렇듯 세조 즉위 이래 성종대까지 네 차례 1등공신으로 책록되고 영의정과 부원군으로 지내며 많은 전답과 노비를 소유해 부의 극치를 누린 그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가 압구정이다.

조선 후기 중국풍의 관념산수화를 뛰어넘어 조선풍의 산수화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정선(鄭敾·1676~1759)이 양천 현령 시절 한강변의 승경(勝景)을 화폭에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남겼는데 그중에 압구정 그림이 있어 그나마 압구정을 만날 수 있다. 여하튼 규모가 대단했는지 중국 명사(明使)가 구경하기를 청해 연회를 열려 했는데 한명회는 압구정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국왕이 어좌(御座)에서 사용하는 전통 장막인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설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뜻이 관철되지 않자 한명회는 노기를 감추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귀양이 결정됐는데, 딸이 왕비인지라 배소길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명회 사후 발발한 윤비폐출 사사사건인 갑자사화로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야말로 한명회의 삶은 도덕과 윤리, 정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마키아벨리즘 자체였다.

이러한 그의 삶은 결과가 참담해 손자 한경기(韓景琦·1472~1529)는 할아버지의 삶을 수치스럽게 여겨 심성을 닦는다고 언제나 홀로 문을 닫고 앉아 아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으며, 계집종들이 근처에만 와도 지팡이를 들고 쫓아가 야단을 쳤다고 한다. 한경기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할아버지의 비정한 행적을 알고 허무주의에 빠져 공신의 손자라 하여 나라에서 준 음직(蔭職)도 마다했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 남효온, 홍유손 같은 선비들과 어울려 시와 벗하고 살아 할아버지 한명회와는 달리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조선의 이태백이란 말을 들었다.

최근 서울 강남구가 ‘한강 공공성 회복 사업’의 일환으로 압구정을 복원하고자 압구정 복원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잊힌 역사의 복원이라는 점에서는 반갑지만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인물과 문화유산의 복원이라 씁쓰레하다. 황희와 한명회의 삶만큼이나 정자 또한 대조를 이뤄 오늘을 사는 후손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 나 자신을 위하여 또는 후손을 위하여 가슴에 정자를 짓는다면 반구정과 압구정 중 어느 것을 지어 갈매기와 벗 삼아 즐길 것인가.’



주간동아 2009.05.05 684호 (p78~79)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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