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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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기웃거리는 88만원 세대의 초상

‘부코스키가 간다’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9-04-03 18: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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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를 기웃거리는 88만원 세대의 초상

    한재호 지음/ 창비 펴냄/ 232쪽/ 9800원

    미국의 ‘빈털터리 세대’, 유럽의 ‘1000유로 세대’,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모두 경제위기 속에서 흔들리는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두 동명의 책 제목에서 따왔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용어가 ‘하류사회’다. ‘하류사회’ 역시 대졸 임금의 ‘10분의 1’도 벌지 못하는 세대를 가리킨다. 젊은이가 위기에 놓인 것은 전 세계가 동일하다.

    상황이 이러니 젊은이들의 힘겨운 생의 투쟁을 그린 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68세대’나 ‘386세대’처럼 현실에 대한 근본적 개혁의지나 목숨을 건 삶의 열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들에겐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밖에 없다.

    최근 ‘퍼킹 베를린’(소니아 로시, 프로네시스)과 ‘부코스키가 간다’(한재호, 창비)를 동시에 읽었다. 앞의 책은 ‘천유로 세대의 위험한 선택’이란 부제가 붙은 논픽션이다. 이탈리아 출신 주인공 소니아 로시(물론 가명이다)가 베를린대학을 다니던 20세부터 5년 동안 여러 가명으로 창녀생활을 한 경험을 털어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인터넷 채팅의 스트립걸로 벗은 몸을 보여주는 일을 했지만, 결국 몸을 파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점차 섹스하는 기계로 전락해간다.

    소니아의 삶은 처절하다. 지갑이 비상벨을 울릴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부모에게조차 손을 벌릴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매춘은 경제적인 비참함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했다. 몸매가 좋고 게다가 대학생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몸뚱이를 욕구와 돈의 원천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5년 동안 1000명 이상의 남성과 섹스를 한다. 그러고는 결국 대학 졸업을 앞둔 즈음 번듯한 회사의 인턴사원이 되면서 더 이상 인생의 직업 범위가 가슴과 엉덩이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한다.

    ‘수상한 백수들의 환상적인 이력서’라는 설명이 붙은 소설 ‘부코스키가 간다’에선 표면적으로는 그런 절박감을 찾아볼 수 없다. 대학 졸업 3년차, 예비군 6년의 취업 준비생인 ‘나’는 친구 커플의 결혼 축하연에서 만난 여자 후배와 첫날 섹스를 하고 바로 동거에 들어간다. 그는 매일 쓰레기 같은 이력서를 쓰고, 가끔 ‘아는 사람’의 경조사에 참석하고, 텔레비전으로 유재석을 보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는 한가로운 생활을 반복할 뿐이다. 작가의 설명대로 ‘사회를 기웃거리는 강아지’처럼 행동할 뿐 힘겨운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전혀 읽을 수 없다.



    소설의 중심축은 주인공이 비 오는 날이면 슈퍼마켓의 문을 닫고 서울시내 여기저기를 떠도는 부코스키란 사내의 행적을 쫓는 내용이다. 나중에 주인공이 또 다른 사내로부터 쫓기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런 행위는 그냥 단순하게 반복될 뿐이다. 쫓기와 치열함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구직행위가 지루하게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처한 현실을 살펴보자. “나나 내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대부분 직장이 없는 처지”이며 “온종일 집에서 인터넷을 떠돌며 잠을 청하거나 도서관에서 졸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설령 “직장을 가졌다고 해도 잠시 땡볕을 피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소설 속에서는 부모의 둥지에서 ‘알바’ 한번 제대로 안 해본 서른 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여전히 어머니가 보내주는 반찬통에 의지할 정도로 생활비 모두를 지원받는다. 그러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적인 조언”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한다. 건성으로 삶을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결과다.

    이 소설은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언뜻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지루한 사건을 미묘한 반복과 변주로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거듭되는 미행 속에서 일상적 공간으로서의 다층적인 면모가 드러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주민들 간의 건조한 관계가 풍부한 암시로써 새롭게 조명된다. 초월과 구원의 가능성이 봉쇄된 요지부동의 현실에 섣불리 분노하거나 쉽게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유해내는 능력은 이 작품만의 미덕”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현실이 피눈물의 의미를 깨친 자의 현실이 아니라 그저 벤츠 타고 지나가며 한순간 스쳐 지나간 장면을 무미건조하게 그려낸 현실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졌다. 그렇다고 소니아처럼 몸을 마구 굴리는 것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한 방울의 땀이라도 제대로 흘려봐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젊은이들을 생존투쟁의 현실로 내모는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시스템의 위기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로 몰아넣은 결과 개인의 삶이 처절하게 피폐해질 수밖에 없음이 만천하에 증명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설픈 백수들의 이야기가 아닌 젊은이들의 고투과정을 핍진하게 그리는 소설이 늘어나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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