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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조선시대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1000년 과거시험 황당 에피소드 … 문제 출제 오류 후 다시 오류 내 파면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조선시대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 풍경. 18세기 조선 지식인 사회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의 확충과 지식 검색의 중요성이 부각됐다는 점에서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 한국사회와 유사하다.

“근래 홍건적(紅巾賊)이 강을 건너 침략했는데,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어떤 책(策)과 술수(術數)가 의(義)에 합치하겠는가.”

이것은 650년 전인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치러진 문과의 시제(試題)다. 당시 경상도 영천 출신의 23세 청년이 과거에 응시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다음과 같은 대책문(對策文·답안지)으로 써내려가 장원 급제했다.

“문무를 함께 써야 하는 것은 왕이 따라야 할 대법(大法)이며 만대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근래에 이런 것들이 무너져 홍건적이 생겼다. 문무를 겸한 인재를 중용해야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 강태공, 사마양저(제나라 병법가), 제갈량 같은 사람들이 문무를 겸해 인의(仁義)로 적을 물리쳤다. 이런 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 청년이 누구인가. 바로 고려 말 성리학을 체계화한 동방 이학(理學)의 종조이자, ‘단심가(丹心歌)’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화를 보여준 포은 정몽주(1337~1392)다. 정몽주는 문신이면서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 이성계와 더불어 여진 토벌에 참가하고, 왜구에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쇄환(刷還)했으며, 우왕 6년(1380)의 황산대첩에 이성계 이지란 등과 참전해 왜구를 섬멸하는 데 기여했다.

고려 말 - 조선 중종대 30여 명 답안지 발견



최근 조선 정조의 어찰(御札)이 무더기로 발견된 데 이어,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 말∼조선 중종대 문신 30여 명이 쓴 과거 답안지가 발견돼 역사학계를 흥분시켰다. 오늘날 공무원 임용시험에 해당하는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 처음 실시됐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무과를 추가해 보완하는 등 그 형식을 존속시켜 인재를 선발하다 갑오개혁(1894년 7월)으로 폐지될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시행됐다. 과거 외에도 음서, 유일(遺逸·천거) 등이 있었지만 역시 과거가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국가경영 철학을 확립하며 국가 발전의 구체적 정책을 제시하는 근간이 된 것이다. 고려·조선시대 국가 동량지재(棟梁之材)를 선발하는 등용문인 과거는 10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그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과거 문제 출제 오류로 처벌을 받은 관리의 얘기다. 고려 인종 때 이부시랑(吏部侍郞) 임존과 평장사(平章事) 최자성(1065~ 1143)은 과거를 관장하는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지공거(知貢擧)로 임명됐다. 인종 10년(1132) 윤4월에 시행된 과거에서 임존이 부(賦)의 제목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성인은 능히 천하로써 집을 삼는다(聖人耐以天下爲一家)’라는 구절을 출제했다.

이에 대해 중서문하성의 간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상고하건대 ‘내(耐)’자는 (문장 의미로 봤을 때) ‘능(能)’자로서 ‘능’으로 읽어야 할 것인즉 ‘내’로 발음하였으니 옳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시관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시관을 바꾸지는 않고 최자성 등에게 명해 다시 시험을 시행케 했다. 이에 최자성이 ‘천도불한이능구(天道不閑以能久)’를 출제했다.

조선시대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대표 유학자 정몽주(위). 처음 발견된 정몽주의 과거 답안지(아래).

또 대성(臺省)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예기’에 ‘천도불폐이능구(天道不閉以能久)’라고 하였으니, 닫을 폐(閉)를 막을 한(閑)으로 한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공원(貢院·과거 담당부서)에서 경서를 참고하지 않고 착오가 있는 책에 의거하였으니, 두 사람의 공거직을 파면하고 금년 과거는 중지할 것을 청합니다”라 했다. 공무원시험 문제가 두 번이나 잘못 출제된 셈이다.

그러자 왕은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기 난감해 경서 과목의 의(義)와 론(論)에 응시한 자 중에서 기용할 만한 25명만 골라 급제시켰다. 그 후 왕은 최자성과 임존을 파직하고, 형부(刑部)에 명령해 그들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둘째, 세 번의 과거에 모두 꼴찌로 뽑힌 한 유생의 얘기다. 조선 문종 즉위년(1450) 경오년에 삼시(초시, 복시, 전시의 세 차례 시험)를 한 번에 치러 동시에 합격한 두 사람이 있었다. 권람(1416~1465)과 김수광이었다. 권람은 세 번 다 장원으로 합격했고, 김수광은 세 번 모두 꼴찌로 합격했다. 세 차례의 수석은 삼장장원(三場壯元)이라 하여 경외의 대상이 됐으나, 세 차례의 꼴찌는 삼장미말(三場尾末)이라 하여 사대부 간에 조소거리가 됐다.

천민에서 과거 급제 … 형조판서까지 지내

삼장장원한 권람은 그 후 한명회와 더불어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끊임없이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일등에 책록됐고 좌의정까지 올라 부귀공명을 누렸다. 그러면 김수광은 어찌 됐을까. 그는 군수로 임명돼 지방 수령으로 내려갔다. 그 후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했으나 단종 원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 발발 이후 수양대군이 집권, 수양의 일파가 득세해 다른 이들은 꼼짝도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김수광도 수양의 무리가 아니었기에 지방 군수로 옮겨다니다 수양이 세조로 즉위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영남으로 낙향, 농촌에 파묻혀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오직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그의 이름이 전할 뿐이다.

셋째는 미천한 신분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의 애환을 보여주는 얘기다. 조선 중종 때 반석평(?~1540)은 어떤 재상의 창두(蒼頭·종)였으나 워낙 총명했기에 재상이 글을 가르쳐 중종 2년(1507)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천얼 출신이라 탄핵도 받았지만 당대 조광조 김식 등 기묘사림과 교유하며 청렴겸공으로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후일 주인집 자손이 잔미(殘微·변변치 못함)해 비루했지만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또한 조선 헌종 10년(1844) 83세 나이로 소과(진사시)에 급제한 중인(中人) 여항시인(閭巷詩人) 조수삼(1762~1849)이 있는데, 그는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무리를 향해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를 묻지 마소. 육십 년 전에 스물셋이었다네”라는, 신분제 사회를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 조수삼은 당시 추사 김정희와 교유하고 조만영 조인영 등 풍양조씨 세도가의 후원을 받았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회현실을 시로 읊었는데 김정희는 조수삼의 시를 두보의 시풍에 근접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과거에 얽힌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면서 특히 김수광이 떠오르는 것은 그가 세 번 과거에 모두 꼴찌로 뽑혀 난세에 자신의 학력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각종 비리에 연루된 공직자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학력과 경력을 가진 출중한 인물이지만 그들의 삶은 과연 당당한가. 인간은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지조에 따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주간동아 2009.03.24 678호 (p76~77)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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