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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선과 악 혼돈의 땅 영웅 배트맨 화려한 귀환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선과 악 혼돈의 땅 영웅 배트맨 화려한 귀환

선과 악 혼돈의 땅 영웅 배트맨 화려한 귀환

어둠이 깔린 고담시 위를 날아가는 배트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시카고와 홍콩 등의 부감 촬영으로 어떤 ‘배트맨’ 시리즈보다 사실적인 고담시를 재현했다.

푸르고 검은 화염이 온 도시를 뒤덮는다. 그건 꿈일까, 계시일까, 전조일까. 이어지는 장면은 은행털이를 하는 일당의 남자들. 모두 조커 마스크를 쓴 이들은 전작 ‘배트맨 비긴즈’의 암시대로 기어이 이 도시 고담을 털러 돌아왔다. 마피아는 악당과 결탁하고, 경찰은 마피아와 내통하는 이 땅. 배트맨은 의사를 찾지 못한 채 상처를 스스로 꿰매고, 마천루 사이에서 검은 날개 흩날리며 자신의 예전 애인과 사귀는 멋들어진 검사와 맞부딪쳐야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는 자신의 출신 성분 자체인 배트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배트맨의 연대기를 창조한다. ‘다크 나이트, 암흑의 기사’라니. 물론 배트맨 원작 만화에서 배트맨의 애칭은 암흑의 기사였지만, ‘배트맨 1 2 3’ ‘배트맨 비긴즈’ ‘배트맨과 로빈’ 등 이제까지 배트맨을 포기한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란은 놀랍게도 배트맨의 딱지를 떼버리고 ‘Dark Knight의 수난기’인지, 한 도시의 ‘Dark Night 탄생기’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액션 누아르를 창조하고야 말았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사랑하는 영웅물인 동시에 ‘고담 컨피덴셜’이라 해도 좋을 만큼 누아르의 취향이 짙게 배어나온다. 달콤한 면은 사라지고 오직 쌉쌀한 검은 맛만 살아남는 순도 99%의 다크 초콜릿처럼. 그러나 영화는 할리우드가 창조해낸 진정한 걸작 중 한 편이다.

으스스한 고딕풍 도시였던 고담은 이제 유리가 반들거리고 마천루가 동네 슈퍼마켓보다 가까운, 범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성채로 변모했다. B급 호러와 표현주의를 사랑했던 청년감독 팀 버튼의 손에서 몽환적인 고담이 탄생했다면, 영국 출신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9·11 이후의 미국을 은유하는 차가운 땅으로 고담을 되돌리며 철저한 사실주의의 외관을 덧씌운다. 결과적으로 시카고나 홍콩에서 직접 현지 촬영을, 그것도 아이맥스 촬영을 감행했던 고담의 부감 샷들은 세계 어떤 거대 도시의 밤과도 다르지 않은 색깔을 지녔다.

액션과 누아르 … 1월 사망 히스 레저 악마적 열연



이들만이 ‘다크 나이트’의 색깔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크 나이트’ 주인공들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며 어느 때보다 고독하고 허무한 심연의 늪에서 긴 그림자 놀이를 벌인다. ‘배트맨’의 가장 합법적인 적자처럼 보이는 신임 검사보 하비 덴트는 늘 앞면만 나오게 만든 행운의 동전처럼, 가장 양지 쪽에 선 인물인가 싶다가 어느새 마천루 시궁창에 얼굴을 박고 만다. 조커는 더 이상 유쾌발랄한 우상 파괴자가 아니라, 지독히 자학적이고 상처투성이의 가면에 텅 빈 광기의 충동으로 가득하다. 배트맨의 얼터 에고(분신)로 양지와 음지를 대변하는 것 같은 하비 덴트와 조커 모두는 배트맨과 악몽의 미궁에서 죽음의 블루스를 추며 혼돈의 키스를 나눠 가진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들의 심리적 흉터, 날것 그대로인 파괴적 충동은 배트맨의 오만하고 차가운 외관(감독이 하워드 휴즈를 참조했다는)에 비하면 오히려 더 솔직하고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조커가 DNA도 치아식별도 지문도 없는 백지 상태로 자신이 누구인지 숨긴다면, 배트맨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갑부의 자식으로 숨겨진 문, 숨겨진 사무실, 숨겨진 차와 애인마저 다시 숨겨야 한다. 그래서 경찰 취조실에서 광분하는 배트맨이 조커보다 더 자신을 속이는 가엾은 인간으로 보이며, 조커가 배트맨에게 “넌 날 완전하게 만들어”라며 키득거릴 때 슬며시 조커에게서 연민의 정마저 느낀다(물론 새로운 조커의 탄생은 1월 약물중독으로 작고한 히스 레저의 악마적인 열연에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반전과 반전의 재미 … 흥행 역사 다시 쓰기

선과 악 혼돈의 땅 영웅 배트맨 화려한 귀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로 등장한 히스 레저. 그는 올해 1월 뉴욕의 자택에서 약물 과용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배트맨의 망상이나 조커의 환상, 하비 덴트의 악몽일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에서는 보는 이의 진술성에 따라 영화의 주관성이 담보된다. ‘다크 나이트’의 정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들어낸 거대한 ‘혼돈의 구덩이’ 앞에 서보는 경험이다. “진실만으론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다크 나이트’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가 왜 마술사의 엄혹한 진실게임인 ‘프레스티지’를 만들고, 시간의 퍼즐게임인 ‘메멘토’를 만들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은 진정 진실의 교란자, 혼돈의 전도사, 이성의 파괴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커가 말한 ‘광기의 가속도’ 만땅인 이 ‘미치광이 롤러코스터’에 부디 몸을 담그시길. ‘다크 나이트’에서 모든 것은 뒤바뀌어 있었다. 영웅은 검고 악당은 희다. 의사 복장을 한 이들은 범인이었고, 광대 가면을 쓴 이들은 인질이었다. 검사는 살인마가 되고, 살인마는 한 도시를 벌하는 검사가 되었다. 영화 속 모두는 마음의 뒷골목을 헤매며 사적인 선택과 공적인 선택, 어떤 윤리적 교차점을 헤맨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당신은 합법과 정직의 편만을 들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 미몽과 흉터로 가득한 놀이터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다크 나이트’는 우리가 광기의 가속도에 놀랄지언정 가속도를 거부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며, 미국에서 지금 ‘타이타닉’ 흥행의 역사를 추격하고 있다. )

다시 개들에게 쫓기며 도시의 진창을 헤맬 배트맨의 운명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웅으로 죽거나 끝까지 살아남아 악당이 되는 것.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메멘토’처럼 ‘다크 나이트’의 속편은 또 다른 혼돈의 시작이자, 전편보다 더 혼돈스런 선과 악의 캐논변주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주간동아 2008.08.26 650호 (p68~70)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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