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2

2008.04.22

31세 미혼녀, 그녀가 사는 법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8-04-14 1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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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세 미혼녀, 그녀가 사는 법

    <b>스타일</b><br> 백영옥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336쪽/ 1만원

    알파걸(엘리트 소녀), 골드미스(고소득의 미혼녀), 스완족(성공을 거둔 미혼의 강한 여성들), 밀리오네제(고소득의 이혼녀) 등은 마케팅을 위해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을 일컫는 용어다. 시장에서 이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구매력이지만, 구매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외모와 몸매를 위해서라면 못하는 일이 없고 명품 소비를 최우선에 둔다 해서 그들 개개인의 삶이 소중하지 않을 리 없다.

    요즘 남남경쟁이나 남녀경쟁 이상으로 ‘여여경쟁’이 심화됐다. 일부 주부들은 여전히 자녀의 성적에 목숨을 거는 듯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개인 생활과 일의 균형을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아니, 일을 위해서라면 개인 생활을 포기하기도 한다. 또 미혼여성은 왜 그리 날로 늘어나는지.

    하여튼 그들도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지라 세상과 이웃, 친구나 동료와 친해지는 법부터 익히려 한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아마 경쟁에서 이기는 법일 것이다. 그 결과 지난 몇 년간 여성용 자기계발서가 큰 흐름을 이뤘다. 이 분야를 선도한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남인숙, 랜덤하우스코리아)가 밀리언셀러를 눈앞에 두고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중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젊은 여성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 우리 소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주로 서양에서 건너온 칙릿(chicklit)을 즐겼다. 아니면 존재의 쓸쓸함을 다룬 일본소설이나. 칙릿은 젊은 여성을 뜻하는 ‘칙(chick)’이란 단어와 문학(literature)의 앞부분 ‘릿(lit)’을 합친 신조어로 주로 미디어나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도시 여성들의 성과 사랑, 일을 수다 떨듯 가볍게 풀어간 소설을 뜻한다. 칙릿은 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처음 등장해 미국과 아시아, 동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렌 필딩, 문학사상사)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문학동네)가 대표적이다.

    우리도 이제 괜찮은 칙릿을 하나 갖게 되었구나, 감탄하게 만드는 소설이 등장했다. 올해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스타일’이다. 이 소설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사람들은 심사위원이나 관계자들이었던 것 같은데, 어찌하다 그 소식이 내게도 들렸다. 소식을 듣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해 읽었다. 소설은 뒤로 갈수록 더욱 흥미진진하다. 앞에 깔렸던 복선이 구체화되는 반전이 계속되자 ‘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31세의 미혼여성인 이서정은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패션잡지 ‘A’의 라이선스인 ‘A 매거진 코리아’ 피처팀에서 일한다. 피처팀은 패션(옷과 디자이너)과 뷰티(화장품과 미용 관련 수술)를 제외한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부서다. 주인공은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인터뷰를 위해 1년 이상 전화를 걸기도 하고 스키니진 체험기를 쓰기 위해 무리한 살빼기를 감행하기도 한다. 또 익명으로 레스토랑 체험기를 기고해 잡지 부수를 늘려온 ‘닥터 레스토랑’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애쓴다. 소설 속에 패션잡지 세계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 것은 작가 자신이‘하퍼스 바자’라는 패션잡지에 근무한 이력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서정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처럼 자본주의의 신기루만을 좇지는 않는다. 파리나 뉴욕의 패션쇼를 보러 다니고 파티에 참석하는 고상한 일은 없다. 광고주에게 잘 보이려고 얼굴을 들이미는 비굴한 일상은 있지만 말이다. 늘 싸움닭이나 투사가 되어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싸워야만 한다. 서른한 살이라면 갖추고 있을 보험이나 그 흔한 펀드도 없고, 날마다 담배를 피우며 비타민을 챙겨 먹는다. 오죽 담배를 물고 살면 담배가 여섯 번째 손가락일까? 카드값에 낑낑대면서 난치병 아이들과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도 한다. 유기농 커피를 파는 카페를 취재한 뒤, 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윤리적인 커피 농가들을 위한 모금에도 앞장선다.

    주인공의 이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주인공의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이 아니라 현대식 백화점이 세워지고, 새로 개통한 지하철이 들어서던 성수대교 근처 아파트라는 도시의 한구석이다. 주인공은 금강산 비경보다 벚꽃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단지 풍경에서 더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곳은 결코 한 시인의 말처럼 욕망의 집착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열일곱 나이였을 때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쌍둥이 언니 중 한 사람이 그 사고에 희생됐다. 탯줄처럼 영혼이 연결돼 있던 소울메이트를 잃은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살아남은 다른 언니는 다니던 병원에 사표를 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주인공은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마다 성수대교를 지나갔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이다. 살아 있음을 증명받기 위해 비극에 기대는 안간힘. 이 소설에는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는 허술한 도시에서 견디고 있는 우리들의 비애가 잔뜩 묻어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서 벌이는 연애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는 다른 칙릿과 비슷하지만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삶을 제대로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수입된 칙릿과는 분명 구별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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